감자밥에 서린 유년의 추억

감자밥 사이로 아롱진 어머니의 얼굴

등록 2008.09.07 10:49수정 2008.09.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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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퇴근 길. 아내는 운동을 나갔는지 집에 없고, 아이들은 저마다 공부와 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출출한 속을 달래느라 내 손길은 자연스레 냉장고로 향하고, 김치와 고구마줄기, 식어버린 조기 한 마리를 꺼내들고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입맛도 별로 없어, 허브 차 한 잔 끓여서 국 대신 훌훌 마시기로 했다. 그러다 언뜻 감자밥을 한 번 해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식탁 한 구석에 놓인 감자와 고구마가 담긴 그릇을 끌어당겨 뚜껑을 열어보았다. 감자 반 토막과 고구마 반 토막. 아마도 아내가 혼자 먹다가 남긴 모양이었다. 난 감자를 다시 반 토막 내어서 밥에 넣고 쓱쓱 비비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요리조리 놀리다 보니 어느새 감자는 으깨어져서 밥과 알 맞춤하게 혼합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비벼지자 한 술 떠 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한 숟가락 가득 감자밥을 떠서 입안으로 가져가니 어느새 혀끝에는 그리운 어머니의 향수가, 그리운 유년 시절의 향수가 진득하게 배어나왔다. 슬며시 감기는 눈. 감은 눈 사이로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잔잔히 떠올랐다.

a  고구마와 감자

고구마와 감자 ⓒ 김대갑


어머니는 유독 감자밥을 좋아하셨다. 이틀이 멀다하고 감자에 밥을 비벼서 드시곤 하였다. 그러나 난 감자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밥맛도 어딘가 모르게 심심한데다 연약하게 부서지는 감자의 속살이 밥알과 섞이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지. 왜 엄마는 이걸 좋아하시는 걸까?'

그러나 어머니는 감자밥을 너무나 맛있게 드셨다. 특히 추운 겨울날이면 동치미 국물과 함께 감자밥을 즐겨 드셨는데, 드시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감자밥인 것 같았다. 늘 젖어 있었고 잔주름이 가득 찼던 어머니의 손. 그 투박한 손으로 감자밥을 드시던 어머니.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왜 어머니가 감자밥을 그리도 많이 드셨는지 이해가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불안정한 직업 탓에 우리 집은 늘 빈한했다. 어쩔 때는 쌀을 편지봉투에 담아 사왔을 정도로 우리 집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살림의 연속이었다. 흰 쌀밥이랬자 명절 때나 맛볼 뿐, 언제나 우리 집의 식사는 보리 반 쌀 반의 혼합식이었다. 그러다 어쩔 때는 감자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난 감자밥을 안 먹겠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화 한 번 내시지 않고 막내인 나를 달래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늘 내가 남긴 감자밥을 혼자 드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맛있는 밥을 왜 안 먹느냐면서 마치 내가 너무 맛있는 것을 못 먹는 바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면 난 의아스러워서 어머니 몰래 감자밥을 한 술 떠서 먹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맛없는 밥이긴 마찬가지였다.


a  감자밥

감자밥 ⓒ 김대갑


그때만 해도 감자나 고구마는 무척이나 싼 곡물이었다. 결국 어머닌 아이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당신의 밥에 감자를 섞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너무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던 것이다.

다시 감자밥을 입으로 가져간다. 심심한 맛이 입안 가득히 몰려온다. 어쩌면 그것은 푸근한 시골의 맛인지도 모른다. 맑은 시냇물이 참나리 꽃을 희롱하며 흘러가는 작은 시골 마을의 정겨운 맛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가 단순히 한 톨의 쌀을 아끼기 위하여 감자밥을 드신 것은 아닐 것이다. 두고 온 고향 산천이 그리워서, 두고 온 형제자매가 그리워서 감자밥을 그리도 즐겨 드신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내가 만든 감자밥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감자밥이라는 희한한 음식을 먹는 아빠를 연신 신기하게 쳐다본다. 아빠, 왜 그렇게 먹어 라며 막내 아들놈이 식탁 의자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본다.

잠시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그 옛 시절에도 우리 어머니도 내 눈동자를 그렇게 내려다보셨을 것이다. 늘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못난 아들을 늘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감자밥 사이로 아롱져 보였다.

어머니는 지금도 감자밥을 즐겨 드실까? 아마 드실 것이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드셨지만 지금은 고향의 맛을 잊어먹지 않기 위해 드실 것이다. 어머니의 부모 형제들이 수도 없이 많이 드셨던 그 감자밥을 여전히 드실 것이다.

감자밥에 어린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내 유년시절의 잔잔한 그리움. 감자밥에 어린 고향의 푸근한 맛이 어느새 집안에 곱다시 내려앉았다.        

덧붙이는 글 | 국제신문에도 송고함


덧붙이는 글 국제신문에도 송고함
#감자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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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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