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식품을 국민 밥상에 올릴 수 없었다"

정부-여당 샌드위치 압박 뚫고 '날치기' 거부한 김형오 의장

등록 2008.09.12 12:24수정 2008.09.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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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원내대표,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 박병석 정책위의장이 12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한나라당 추가경정예산안의 국회 단독 처리시도에 관련하여 이야기를 마친뒤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 유성호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원내대표,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 박병석 정책위의장이 12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한나라당 추가경정예산안의 국회 단독 처리시도에 관련하여 이야기를 마친뒤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 유성호

12일 오전 9시경, 민주당은 당초 예정돼 있던 서울역 앞 추석 귀향인사까지 미룬 채 긴급하게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날 새벽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이 불참한 가운데 추가경정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시도하려다가 무산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

 

이날 회의에서는 수를 앞세운 거대 여당의 '횡포'에 대한 대대적인 성토가 예상됐다. 그런데 회의도 시작하기 전에 박주선 최고위원과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가 김형오 국회의장의 처신을 놓고 설전을 주고받았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김형오 의장이 한나라당이 요구한 직권상정을 하지 않은 것은 소신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김 의장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자 서갑원 부대표는 "원래 절차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에 직권상정을 할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에 박주선 최고위원은 "물론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김 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도 있었는데..."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한동안 실랑이가 오가자, 박병석 정책위의장이 "진위는 나중에 가리자"며 중재에 나섰고,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한나라, 추경안 '날치기' 실패... 민주 "미숙하고 졸렬한 군사작전" 

 

하지만 김형오 의장에 대한 평가는 회의석상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원혜영 원내대표는 "다행히 김형오 의장이 원칙을 가지고 국회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올바른 입장을 고수해서 한나라당의 날치기를 막았다"고 치하했다.

 

원 대표는 또 "국회 운영의 본질이 대화와 타협인데, 한나라당은 군사작전을 아주 미숙하고 졸렬하게 감행하다가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었다"며 "이제라도 국민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라"고 촉구했다.

 

정세균 대표도 "오늘 새벽은 지난 10년동안 쌓아온 민주주의를 완전히 전두환 때로 후퇴시킨 안타까운 순간이었다"며 "예산안 날치기는 전두환 시절 이후 국회에서 사라진 일"이라고 지적했다.

 

정 대표는 이어 "그나마 본회의에서 한나라당의 날치기가 성공 못한 것은 지난 10년 동안 쌓아온 의회 민주주의 정신 때문이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김형오 의장에 대한 우회적인 치하인 셈이다.

 

도대체 이날 새벽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나라당은 전날(11일) 밤 민주당과의 협상에서 한전 및 가스공사 손실 보조금 등에 대해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하자, 12일 새벽 민주당 등이 불참한 가운데 자유선진당 등과 함께 예결특위 추경심사소위와 전체회의를 잇따라 열고 4조2677억원 규모의 추경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예결특위 전체회의 추경안 의결 당시 한나라당 의원 1명에 대한 사보임 절차가 완결되지 못해 의결정족수가 충족되지 않은 채 처리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고, 이에 민주당이 반발하면서 본회의 개회가 지연됐다.

 

한나라당은 본회의장에 4시간 동안 의원들을 대기시킨 채 예결특위 정족수 논란을 피하기 위해 김형오 의장에게 추경안 직권상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의장은 "절차적 하자가 있기 때문에 직권상정을 할 수 없다"는 거부 의사를 밝혀왔고, 결국 한나라당의 추경안 처리는 무산됐다.

 

청와대 "(혼자만) 뒤로 빠지는 건 옳지 않아"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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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1일 18대 국회 첫 정기국회 개원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1일 18대 국회 첫 정기국회 개원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당장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청와대측은 추경안의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한 김 의장의 행동을 성토하고 나섰다. 여당 소속 국회의장이 어떻게 야당 편을 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날 추경안 처리 무산 직후 원내대표직 사의를 표명한 홍준표 원내대표도 김 의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국회를 원만히 이끌어나가겠다는 김형오 의장 때문에 홍 원내대표가 많이 힘들어 했다"며 "김 의장이 본회의 사회를 거부하지만 않았더라도 결국 예산안이 처리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고 전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홍준표 대표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고, 국회의장한테도 문제가 있다"며 "개인적 소신도 좋지만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뒤로 빠지는 건 옳지 않다"고 비난했다.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샌드위치 압박'을 받고 있는 김형오 의장측은 "국회법을 존중하려는 생각에서 소신을 지켰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김 의장의 한 측근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길고도 긴 밤이었다"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 측근은 특히 "불량식품(추경안)을 국민 밥상 위에 올려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며 "집안(정부여당)에서 올 수 있는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정말 어려운 선택을 했다"고 토로했다. 김형오 의장이 한나라당의 거센 요구에도 불구하고 직권상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세 가지라고 한다.

 

"만약 추경안을 처리했다면, 민심의 역풍, 정국 경색이 우려될 뿐 아니라 의회사에 오점을 남긴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절차에 문제가 있는 추경안의 처리를 위해 입법부의 수장이 앞장설 수는 없었다. 한나라당이 요구한 직권상정도 절차적 하자를 치유하기 위한 편법이지 않았나."

 

그러나 이날 새벽 한나라당 의원 150여명은 무려 4시간 이상 본회의장에서 김형오 의장을 기다렸다. 여당 출신 의장이기 때문에 본회의 사회를 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김 의장은 본회의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불량품, 심야, 턱걸이 과반... 어떻게 사회를 보나?"

 

이 측근은 "국민과 당 사이에서 고뇌와 고통이 컸다"며 "하지만 하자가 있는 불량품인데다, 심야였고, 민주당까지 빠진 상태에서 겨우 턱걸이 과반이라는 악조건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쳤는데, 어떻게 본회의 사회를 볼 수 있었겠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오히려 김형오 의장을 비판하는 여당에 대한 원망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의장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예결위 관리도 못하고 본회의 의원 정족수도 안됐다. 절차적 하자가 없어도 민주당이 빠져서는 어려운 상황인데, 절차적 하자까지 있는 안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마음만 급했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점검하지도 않았다."

 

김형오 의장은 홍준표 원내대표보다 먼저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낸 선배다. 자기가 할 때는 이렇게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의장은 이번 추경안 처리 뿐만 아니라 홍 원내대표와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재윤(민주당), 문국현(창조한국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 문제였다.

 

홍 원내대표는 지난 8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불구속 수사 원칙을 밝힌 김 의장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며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가 되지 않으면 체포동의안을 직권상정할지 말지 할 권한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회의 직전 CBS라디오 인터뷰에서도 "마치 불구속 수사하도록 하라는 행정부에 지시하는 듯한 것은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며 "옳지 않은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날 김재윤, 문국현 의원에 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이송됐다. 그러나 김형오 의장은 '불구속 기소가 원칙'이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체포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김형오 국회의장의 소신과 원칙이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김유정 대변인)는 논평까지 내며 김 의장을 격려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두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김 의장의 측근은 "행정부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 완전히 야당에 치우친 것 아니냐면서 정부여당은 이상한 눈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다"며 "누구라도 도망갈 위험이 없다면 불구속 기소 상태에서 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인신을 미리 구속시키는 것은 법의 나쁜 관례라는 소신에 따라 처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 측근은 "김 의장은 국회를 원만하게 이끌고 가야한다는 큰 원칙 속에서 고군분투 하지만, 정부와 여당 사이에서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지금까지는 김 의장의 진정성이 정부여당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입법부 수장으로서 행정부와 집권여당에 맞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소신을 지켜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08.09.12 12:24 ⓒ 2008 OhmyNews
#김형오 국회의장 #추가경정 예산안 #홍준표 원내대표 #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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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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