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도 올망졸망 열매를 호박
박도
오늘 아내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서 그제야 그 말이 퍼뜩 생각나 바구니를 들고 텃밭으로 갔다. 넝쿨을 들추자 이 가뭄에도 호박은 꽃을 피우고, 올망졸망 열매를 맺기에 한창이었다.
잠깐 새 주먹 크기만한 애호박 네 덩이를 땄다. 요즘 산골마을은 가을 가뭄이 어찌나 심한지 텃밭에는 물기가 전혀 없고 밭고랑을 밟으면 그대로 흙이 푹 내려갔다. 이런 가뭄에도 시들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호박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나는 애호박을 따면서 흙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내가 참 염치없는 사람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올 봄에도 텃밭에다 호박을 비롯한 고추 오이 가지 등 남새를 잔뜩 심어놓고는 그동안 열심히 가꾸지 못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호남지방 의병전적지 답사 다닌다고, 그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고, 또 올 연말에 나올 새로운 신간 원고를 쓴다고 텃밭을 팽개치다시피 돌보지 않았다.
아내가 그동안 남새를 심어만 놓고 돌보지도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다가 지쳤음인지 이즈음에는 아예 제쳐두고 혼자 텃밭을 가꾸면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싱싱한 푸성귀를 밥상에 부지런히 올렸다. 올해는 텃밭 농사가 잘돼 호박잎과 오이, 가지, 풋고추는 입에 물리도록 실컷 먹었다. 애호박을 따오고서는 미안한 마음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자 호박도 고추도 파도 조금도 옆으로 흘리지 않고 꿀컥 꿀컥 흔적도 없이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