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이강국과 김수임의 첫 만남

[김갑수 식민지 역사팩션 123회] 3부 '열두개의 눈동자' 첫 회

등록 2008.09.28 12:22수정 2008.09.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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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남과 여

마지막 독서회가 있었던 그 해 가을부터 세 사람의 운명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10명 남짓의 회원 중에서 최소 세 사람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많은 것이 이질적이었던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과 제국주의 일본을 보는 눈이 달랐다. 그러므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론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마음이 허전하고 착잡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두 남자와 한 여자는 다소 어색한 표정과 어설픈 말씨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헤어지고 나서도 변함없이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이강국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경성제대 졸업반인 그는 독일 유학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여름방학 내내 원산에 가서 부두 노동자의 파업을 주동했었다. 그의 지도 교수인 미야케는 권위를 인정받는 사회주의 학자 겸 운동가였다. 이강국은 미야케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야케의 권유대로 노동법을 전공하기로 작정해 놓고 있었다.

작별 후에도 여전히 야심에 차 있는 사람은 나윤숙이었다. 이화여전 영문과에 재학 중인 그녀는 시와 수필을 곧잘 썼다. 그녀는 문단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학교 교수들뿐 아니라 당대의 문사 이광수에게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나라의 독립보다 자신의 문학적 입신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문인으로서 이름을 얻어 자신과 사회를 위해 보다 많은 일을 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임주호는 독서회를 통해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지 못했던 그는 독서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본 것을 유익한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원래 사교적인 모임 같은 데에 관심이 없던 그는 독서회에도 친구가 권해서 잠시 나간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독서회의 주축 멤버는 아니었다. 그는 남녀 회원들과의 교제를 통해 사람이란 겉보기와 달리 의외로 외롭고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져 보기도 했다.

이강국은 그 해 겨울로 예정되었던 유학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독서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방학 때 원산에서 벌인 노조 활동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금고 7개월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경성제대 학생 신분이라는 점이 참작된 형량이었다.


그는 혁명 전사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의연하게 수형 생활에 임했다. 하지만 그 시대 북방의 감옥에서 겨울을 나는 일에는 혹독한 고생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윤숙이 좋아하는 세 가지

기숙사에 돌아온 나윤숙은 데뷔 작품의 퇴고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서구적이고 낭만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쓰는 대부분의 시와 수필들은 근대적 세련미를 갖춘 연가(戀歌) 풍이었다. 사실 그녀는 연애에 흥미와 관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두뇌가 우수한 편이었고 나름대로 감수성도 민감한 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선망하는 남자들을 연인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그녀의 재능과 교양을 인정하면서도 그녀에게 좀처럼 이성적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헤아려볼 줄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호감을 느끼는 남자에게 결정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위해 절제해야만 했다. 그러는 것이 둘 사이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연가 풍의 문학을 추구하는 데에는 이런 미묘하고도 난감한 사연이 잠복되어 있었다.

임주호는 식민지 시대의 학생으로서는 신념이나 의지 같은 것들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정치나 역사 등의 분야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집단적으로 강요되는 일들에 두려움을 느낄 때가 간혹 있었다. 그가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만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이었다. 그는 고보 시절에도 학교에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당연히 그의 학과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그가 보성전문에 합격했을 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기적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한다는 듯이 성적 미달로 제적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만 둘 학교였다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윤숙이 이강국을 만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강국은 나윤숙에게 호감을 준 남자 중의 하나였다. 왜냐 하면 그는 키가 큰 데다 호남형의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경성제대의 학생이었다. 그가 독서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1871~1922, 폴란드 태생의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 독일 우익 장교들에게 살해되었다)의 <자본축적론>을 강의하는 것을 본 나윤숙은 그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어떤 남성이 그녀로부터 인간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정도가 있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외모와 학벌과 교양이었다. 하지만 나윤숙은 이강국이 자기를 인정은 해도 이성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그것은 일면 슬프기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윤숙은 그런 일을 종종 겪어 보았으므로 감정을 조절하고 행동을 절제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강국을 존경하는 선배로 대하면서, 그로부터는 능력 있는 후배로 인정받으면 된다고 타협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허전함이 모두 치유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임의 뜨개질 솜씨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다. 나윤숙은 기숙사 룸메이트이자 후배인 김수임을 데리고 원산 고향 집으로 갔다. 김수임은 고학생이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나윤숙의 집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에 가 공부하고 있는 똑똑한 딸의 친구를 받아들일 정도는 되었다. 두 여학생은 한 이불에서 잤다. 그들의 식탁에는 주로 된장이나 풋고추 그리고 고등어 등이 올랐다. 

두 여학생은 원산의 겨울 바닷가를 산책하기도 했다. 그들은 밟으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운다는 명사(鳴砂)십리 해변을 거닐었다. 겨울 바다에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수임아, 나랑 내일 함흥에 같이 가자."

나윤숙은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강국에게 면회를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생각 끝에 김수임을 데려가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예감대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기로 작정한 뒤였다. 나윤숙은 알고 있었다. 이강국처럼 조국과 사회를 자주 말하면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남자일수록 도리어 맹하게 예쁘장한 여자를 좋아하는 수가 많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나윤숙이 보기에 이강국은 공산주의자였다. 총독부의 공산주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윤숙은 이제 설령 이강국이 자신을 매력 있게 본다고 해도 그와 친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강국이 김수임과 가까워지는 것을 서운해 할 필요가 없었다. 

함흥의 겨울 날씨는 차가웠다. 바닷바람까지 매몰차게 불었다. 두 여학생은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면회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래에 솜바지를 껴입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나윤숙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반면에 김수임은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강국에 대한 얘기는 진작부터 나윤숙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나윤숙이 말하는 이강국은 김수임한테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 교제하는 선배 나윤숙이 부럽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청년과 정작 대면하게 되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면회석에는 마름모꼴 철망이 가로 놓여 있었다.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던 김수임의 눈에 광목 한복을 입은 이강국이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이 먼저 눈에 띄었다. 다음으로는 꺼칠한 턱 밑 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김수임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이강국의 머리가 삭발인 것을 알았다.

"제 후배와 같이 왔어요. 방학이라서 제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후배예요."
"김수임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고맙소. 이 추위에."

이강국은 짤막하게 응대하면서도 김수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생님, 다음에 제가 성경책을 한 권 넣어 드려도 될까요?"
"성경책이라고요? 좋지요. 하지만 성경은 감옥에서 제일 흔한 책이기도 하지요."
"얘는 어딜 가도 이화여전 표를 내고 다녀요."

나윤숙의 말에 김수임은 조금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이강국을 위해 뜨개질을 하고 싶었다. 소녀 시절 선교사 부인들에게 배운 그녀의 뜨개질 솜씨는 일품이었다.(계속)

덧붙이는 글 | 오늘부터 3부 '열두개의 눈동자'가 시작됩니다. 3부에서는 태평양전쟁과 중경 임시정부가 그려집니다.


덧붙이는 글 오늘부터 3부 '열두개의 눈동자'가 시작됩니다. 3부에서는 태평양전쟁과 중경 임시정부가 그려집니다.
#이강국 #미야케 #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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