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간이역에 흐르는 게 어디 추억 뿐이랴

양평 구둔역과 지평막걸리

등록 2008.10.02 11:00수정 2008.10.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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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에 내리면 낭만과 추억을 만난다'고 이 글을 시작하려 했다. 적어도 여기 구둔역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끝자락에 만난 구둔역은 '그저 그랬다'. 하긴 나는 간이역에 대한 추억이 없다.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그런 추억이 없다. 그래서 구둔역에 대한 첫 인상이 그저 그랬는지 모른다.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둔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서울(청량리) 가는 길목이 되어준 구둔역. 2년 후 덕소-원주 간 중앙선 복선 공사가 끝나면 구둔역은 역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맨 왼쪽 큰 나무가 구둔역과 역사를 함께 한 은행나무다.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둔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서울(청량리) 가는 길목이 되어준 구둔역. 2년 후 덕소-원주 간 중앙선 복선 공사가 끝나면 구둔역은 역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맨 왼쪽 큰 나무가 구둔역과 역사를 함께 한 은행나무다.김동욱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일신리에 있는 구둔역은 철도공사가 추천하는 가을 여행지 중 한 곳이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역사(驛舍)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고, 주변 농촌 풍경이 고즈넉해서 가을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러나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구둔역은, 굳이 마음먹고 찾아갈 만한 매력적인 곳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뭔가 그럴싸한 걸 바란다면 구둔역은 마땅히 후보지에서 제외될 곳이다. 하지만 적당히 맑은 날의 호젓한 가을풍경을 담고 싶다면 이만한 곳도 없을 성싶다.

70년 고단한 세월의 구둔역

서울에서 양평 가는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읍-용문면에서 지제면을 지나 여주 쪽으로 꼬불꼬불 짧은 전양고개를 넘는다. 고개 내리막 끝지점에 비로소 중앙선 철길 건널목이 나타난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서 살살이꽃(코스모스)이 예쁘게 피어있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천천히 가다보면 일신리 마을에 닿는다.

 청량리 행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네 주민들이 아예 대합실 의자에 길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
청량리 행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네 주민들이 아예 대합실 의자에 길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김동욱

여기 일신리 마을의 집과 집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휘적휘적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한눈에도 아담한 구둔역이 우뚝 서 있다. 내가 이 작은 간이역을 '우뚝 서'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적어도 여기 이 마을에서는 구둔역보다 큰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한 10년 전만해도 여기 구둔역은 꽤 번잡했지요. 산에서 캔 약초를 팔러 서울 경동시장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서울까지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거든요."


 구둔역은 드라마 세트장 역할도 한 듯 구둔역 대합실에는 잘 알려진 배우들의 사인도 보인다.
구둔역은 드라마 세트장 역할도 한 듯 구둔역 대합실에는 잘 알려진 배우들의 사인도 보인다.김동욱

대합실 긴 의자에 누워 청량리 행 기차를 기다리던 동네 아낙의 얼굴에 구둔역의 지나간 영화가 얼핏 스친다. 하긴 1940년에 영업을 시작한 구둔역의 구구한 역사를 그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합실 앞 철길 쪽 마당에 서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만이 아마 구둔역의 과거와 오늘을 잘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일지 모른다.

역사(驛舍)가 지어질 때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이 은행나무는 고스란히 70년 세월을 구둔역과 함께 보내왔다. 청량리역으로 가는 동네 노인네의 약초 바구니를 인 머리를 쉬게 했고, 여름날이면 자신의 그늘 밑에 삼삼오오 모여서 늘어놓는 서울 간 자식 이야기도 이 은행나무가 다 들었을 거다.


 구둔역에서 키우는 닭들이 역사 마당 한 켠에 쌓아둔 두엄더미에서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구둔역에서 키우는 닭들이 역사 마당 한 켠에 쌓아둔 두엄더미에서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김동욱

그러나 이 은행나무는 이제 더 이상 기차를 볼 수 없게 된다. 오는 2010년 덕소~원주 간 중앙선 복선 공사가 끝나면 구둔역은 역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고단했던 긴 숨을 내려놓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구둔역은 문화재청에 의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따라서 2010년 이후 구둔역의 관리주체는 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 여기 군둔역에는 청량리 가는 무궁화호가 네 번, 그리고 청량리에서 오는 무궁화호가 하루 세 번 선다. 내가 구둔역을 찾았을 때가 마침 청량리 발 무궁화호가 도착하는 때였다.
DSLR 인터넷 사진동호회 회원들이 출사를 나온 듯,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역 마당에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는 그들은 이내 역사(驛舍)를 향해 역사적인 샷을 날린다.

 구둔역 마당 앞 은행나무 아래로 청량리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구둔역 마당 앞 은행나무 아래로 청량리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김동욱

때 아닌 어수선 함에 놀랐는지 예순여덟 먹은 은행나무는 마침 '휘익~' 불어오는 바람에 새파랗게 질린 이파리 몇 장을 역 마당에 떨어뜨린다. 역사 왼쪽(철길 쪽에서 봤을 때는 오른쪽) 마당 한구석에서 서너 마리의 암탉을 거느리고(?) 두엄더미를 뒤지던 수탉 한 마리도 낯선 방문객에게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이들 젊은 청춘들에게 구둔역의 가을을 바통터치 한 후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여기서 멀지 않는 동네, 지평리에 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이번 양평 여행에서는 구둔역보다 우선 머릿속에 그려놨던 곳이 있었다. 지평막걸리 술도가, 즉 막걸리 공장이다.

시큼달콤한 막걸리 향기가 먼저 객을 반긴다

지제면 지평리에 있는 이 '지평막걸리'는 지금 방효연 사장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방 사장의 할아버지가 지난 1925년 처음 문을 연 후 3대째 내려오고 있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술도가다. 그 때 일본식으로 지어진 술도가 건물은 수리 한 번 없이 그대로 서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부터 만들어 오던 전통방식 그대로 아직도 막걸리를 빚고 있다는 점이다.

 지평막걸리 술도가. 건물 왼쪽에 있는 버드나무가 아니었다면 흡사 폐건물로 착각할 뻔 했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인데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본래의 기능을 하고 있다.
지평막걸리 술도가. 건물 왼쪽에 있는 버드나무가 아니었다면 흡사 폐건물로 착각할 뻔 했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인데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본래의 기능을 하고 있다. 김동욱

지평막걸리 공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용문면에서 지제면으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막걸리 특유의 시큼털털한 냄새가 확 코를 찌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술도가는 지제중고등학교 뒷문과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학교 뒷문으로 들락날락 하고 있는데, 한 열 번 쯤 이 골목을 왔다 갔다 하다보면 술 빚는 냄새만으로도 은근히 취기가 돌 듯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공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한쪽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쭈뼛쭈뼛 들어서는 나를 본 직원 한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방효연 사장을 데려나오면서 한 마디 한다.

"여기 기자님 오셨네요."

 지평막걸리 공장 안에 있는 술단지에서 술이 잘 익어가고 있다.
지평막걸리 공장 안에 있는 술단지에서 술이 잘 익어가고 있다.김동욱

아차, 미리 어떤 매체에서 취재 약속을 했었나 보다. 여기 지평막걸리는 '3대가 이어오는 100년 전통의 술도가 어쩌구 저쩌구' 해서 방송을 한 번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여러 잡지사와 신문사 등에서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방 사장와 미리 약속한 그 '기자'가 아니다.

"아~, 선약이 있으신 모양이죠? 저는 이 근처 낚시터에 왔다가 여기 지평막걸리가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한 번 와봤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부 구경 좀 시켜주세요."

어차피 내뱉은 말이라 나는 아주 빠르게(방 사장이 중간에 내 말을 끊지 못하게) 할 말을 다 해 버렸다.

 뚜껑을 열자 시큼한 막걸리 특유의 냄새와 함께 잘 익은 과일향도 났다.
뚜껑을 열자 시큼한 막걸리 특유의 냄새와 함께 잘 익은 과일향도 났다.김동욱

"뭐 볼 게 있다고……. 들어와서 구경해 봐요."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방효연 사장은 의외로 선선히 이방인의 출입을 허락했다.

"이게 발효되고 있는 술단지들입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써오던 거지요."

방 사장이 큰 술단지 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보여준다. 거기에는 부글부글 발효가 한창인 막걸리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방효연 지평막걸리 사장.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방효연 지평막걸리 사장.김동욱
지평막걸리는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인기 좋은 술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90년대 들어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논일 들일의 새참도 막걸리에서 맥주로 바뀌면서 지평막걸리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방 사장의 말을 빌면 '그 때만 해도 한 개 면에 하나 씩 있던 술도가가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려' 이제 지평 막걸리는 한국 술도가의 자존심이 됐다. 그러나 여기 지평 막걸리도 이제는 방 사장 대에서 그 명줄이 끊어질 듯하다.

"대를 이을 거냐구요? 어휴~ 전혀 그럴 생각 없어요. 일도 힘들 뿐 아니라 이젠 젊은 사람들이 막걸리를 찾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방효연 사장이 막걸리를 만드는 그날까지 열심히 지평 막걸리 맛을 봐두는 수 밖에……. 지평막걸리는 그러나 여기 공장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를 하지는 않는다. 지평 막걸리를 사려면 지평 농협하나로마트 맞은편에 있는 지평 막걸리 총판에 가야 한다.

지평 막걸리는 밀로 만든 것과 쌀로 만든 것 두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물을 덜 섞어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은 말통으로 판매한다. 밀가루 막걸리는 1.6리터 한 병에 1700원, 쌀 막걸리는 한 병에 1900원이며, 말통에 담아 파는 쌀막걸리는 2만 5000원이다.

 지평막걸리 술도가에서는 소비자에게 직접 막걸리를 팔지 않는다. 지평막걸리 맛을 보려면 지평리 농협하나로마트 맞은편에 있는 이 도매상을 찾아가야 한다.
지평막걸리 술도가에서는 소비자에게 직접 막걸리를 팔지 않는다. 지평막걸리 맛을 보려면 지평리 농협하나로마트 맞은편에 있는 이 도매상을 찾아가야 한다.김동욱

맛은? 단 맛이 강하면서도 뒷맛은 깔끔하다. 나는 쌀 막걸리와 밀가루 막걸리 두 병씩 사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조수석에 조신하게 묶어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직 시원한 기가 가시지 않은 막걸리를 큰 사발에 가득 따라서 남아있는 끈적끈적한 여름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 잔 가득 따라서 양평 구둔역 은행나무 아래서 느꼈던 가을바람을 천천히 음미했다.

덧붙이는 글 | 구둔역 가는 길 / 서울에서 하남을 거쳐 양평 가는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읍을 지나 용문까지 간다. 용문에서 여주 가는 341번 도로를 따라 지제면을 통과해서 왼쪽 지평저수지를 지나면 작은 고개(전양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를 넘어 중앙선 철길을 건너 2km 정도 가면 구둔역 이정표가 보인다.



구둔역 / 031-773-7733

지평막걸리 술도가 / 031-773-7030


덧붙이는 글 구둔역 가는 길 / 서울에서 하남을 거쳐 양평 가는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읍을 지나 용문까지 간다. 용문에서 여주 가는 341번 도로를 따라 지제면을 통과해서 왼쪽 지평저수지를 지나면 작은 고개(전양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를 넘어 중앙선 철길을 건너 2km 정도 가면 구둔역 이정표가 보인다.



구둔역 / 031-773-7733

지평막걸리 술도가 / 031-773-7030
#양평 구둔역 #지평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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