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오른 안데스 정상... 앗, 여긴 스키장?

[자전거세계여행 칠레→아르헨티나 3탄, 안데스의 축배를①]

등록 2008.10.12 09:45수정 2008.10.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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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지그재그로 보이는 곳이 바로 29커브다. ⓒ 박정규


2008년 9월 10일~13일 동안 자전거로 안데스를 넘어가는 과정을 전합니다.

오전 7시 50분 기상. 안데스의 소문난 29커브길과 첫 미팅이 있는 날이다. 칠레와 이별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날이기에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아쉬움 속에서 눈을 떴다. 조금 걷힌 커튼 사이로 밝은 태양빛이 스며 들어온다. 바람은 늦잠을 잤는지 산 아래로 출근을 서두르느라 나뭇가지란 나뭇가지는 다 흔들어 댄다. 덕분에 나도 서둘러 짐을 챙긴다.


잘하면 오늘 29커브 위의 마을이자 칠레의 마지막 마을인 뽀루띠쇼(Portillo)부터 다운 힐이 가능할 것 같다는 예감에 '세리머니용'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것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상쾌하게 머리를 스친다.

안데스 산길에서,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면

기꺼이 태극기 깃대를 만들어준 도밍고 아저씨. ⓒ 박정규



지금 이 구간의 '태극 세리머니'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2007년 7월말에 북부 안데스의 시작인 베네수엘라(마라카이보호 Maracaibo L: 베네수엘라 북 서부에 있는 유명한 호수)에서 시작해서 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를 거쳐 2008년 9월에서야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는 마지막 안데스의 관문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이자 남미 7개국에 걸쳐있는 7000㎞ 안데스 산맥과의 건강한 이별을 의미하며 남미 여행의 끝이 오고 있음을, 더불어 북아프리카로 페달을 밟을 순간이 오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눈이 많이 오면 길이 며칠이고 막힌다는 게 실감나는 인공터널. ⓒ 박정규


안데스를 넘어가는 길. ⓒ 박정규


둘째, 지금 올라가는 안데스 산맥 구간은 다들 손을 내젓는 길이자 차량들도 헉헉대며 올라가야 하는 29커브길로 유명하며 관광버스·트럭 등의 소통량이 많은 구간이다.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커브길을 올라가는 모습은 외국인들에게 '오! 한국인!'이란 강한 인상과 이제 '한국도 자전거 세계여행을 할 저력(경제력·용기)이 생겼구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심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혹시 한국동포가 봤을 경우에 표현 못할 가슴의 후끈거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2m 짜리 태극기용 깃대를 구하지?.' 숙소 뒤 창고를 이리저리 수색하다 창고 앞 주황색 플라스틱 발견. 길이가 3m가 넘는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망설임 없이 '오케이'다. 한 가지 문제는 생각보다 부실해 보여 하강시 30~50㎞/h 빠른 속력의 맞바람에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마침 작업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고민을 이야기하자 여기저기 찾아 보시더니 엄지 굵기만한 대나무를 찾아냈다. 그걸 메인 깃대로 하고 주황색 플라스틱을 덧대어 고무줄로 고정하니 길이 1m70㎝ 정도의 훌륭한 대형 태극기 깃대가 완성되었다. 이민 1세들은 태극기 휘날리는 흐뭇함을 자주 느끼지 못할 테니까 모처럼 거칠어진 마음밭에 한줄기 장대비의 시원함과 봄 바람이 주는 훈훈함을 느낄 수 있겠지?  

친절하게도 커브길마다 표지판이 있다

고장난 버스. ⓒ 박정규


버스가 고장나서 걸어서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 박정규


커브길 중간에 버스가 멈춰 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30명 가량이 걸어내려온다. 알고 보니 버스가 고장난 것이었다. 

커브길마다 친절하게도 안내 표지판이 있다. 지금이 커브4니까 25커브만 더 올라가면 된다. 커브길에 이렇게 표지판이 설치된 건 처음인 것 같다.

한 자리에서 두 자리로 커브길 숫자가 바뀌면서 아래에 보이는 길 풍경들이 마치 자동차 경주게임 코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들도 그런 상상이 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어, 그럼 난 주인공 캐릭터니까 힘들어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건가? 계속 웃고 즐겁게 올라야겠지?'

친절하게 커브길마다 몇 번째 커브인지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 박정규


뒤쪽에 자세히 보면 대한민국 만세가 보인다. ⓒ 박정규


한숨 돌리려고 터널 밖 갓길로 한번 나가보니, 온통 눈밭이다. 터널을 완전히 덮은 눈이 눈벽을 만들었다. 눈벽에다 '대한민국 만세'란 글자를 손으로 새기는데, 하루이틀 굳은 눈이 아니기 때문에 손가락을 밀어낸다. '질 수 없지!' 수차레 시도 끝에, 손이 얼얼해질 때쯤에 글자를 모두 새길 수 있었다.

뭔가 좀 허전함이 없지 않았지만 삼각대를 세우고 글자 아래에서 기념촬영을! 

아, 드디어 27번째 커브길에 도착!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생각을 하는데, 27커브길이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올라가자!' 5~6m 높이 약간의 경사가 있는 단단해진 눈길을 기어올라가 커브 표지판 옆에 대형 태극기를 꽂았다. '29커브 정복!' 나도 모르게 엉뚱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지만 뿌듯함도 느껴졌다.

커브길을 넘지 않고서는 안데스를 넘을 수 없다. ⓒ 박정규



29커브길을 모두 오르자, 다시 마을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헉! 선택의 여지가 없다. 또 올라가는 거지! 가자! 마음을 다져먹고 다시 페달을 밟은 지 1분도 되지 않아서 수상한 남자 발견!

승용차를 세우고 눈 속에서 뭔가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설마 눈사람?'

"아저씨, 뭐 해요?"

짧은 스포츠 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40대 초반 아저씨가 웃으며 눈 속에서 뭔가를 쑤-욱 뽑아들며 돌아섰다. '어! 오른손에는 술병, 왼손에는 술잔!' '이런! 낭만적인 아저씨 같으니라고!

"자네도 한 잔 받게나!"
"네, 감사합니다."
"한잔 더~"

그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아내와 여행하다가 지금 칠레의 산티아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안데스와 이별주'를 하는 거였다.

"나중에 상파울로 오면 연락하게나, 점심이나 같이 하세~"
"네, 몇 달후에 봬요~"

뭐든 한번에 비워야 하는 줄 알고서 주는 술을 두 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더니 오르막이 흔들흔들 춤을 춘다…….      

커브길이 끝나가고 있는 기념으로. ⓒ 박정규



안데스에서 축배를. ⓒ 박정규


드디어, 정상에 있다는 칠레의 마지막 마을인 뽀루띠쇼(Portillo)에 도착! 앗! 호텔! 스키를 신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관광버스들……. 마을이 아니라 '스키장'이다.

갑자기 머리에 찌-릿한 전기가 흐르며 큰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 6시가 다 돼 가는데, 제대로 된 관광지에 도착하다니. 그래, 가격이나 한 번 물어보자! 열심히 올라온 당신에게 멋진 휴가를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네? 150달러요? 80달러도 있어구요? 수고하세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조나단과 함께 한숨을 쉬면서 어둠이 내리는 오르막을 향해서…….  

칠레의 마지막 마을이자 리조트가 있는 마을 뽀루띠쇼(Portillo). ⓒ 박정규


2008년 9월12일 칠레 안데스에서
꿈을 위해 달리는 청년 박정규 올림

박정규 기자는 < 희망을 찾고, 나누며,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2006년 5월 16일, '희망을 찾아 떠나는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2월 28일까지, 몽골여행, 중국종단, 인도여행, 미국횡단, 쿠바일주,
남미일주, 북아프리카 횡단을 계획 중입니다. 2008년 9월, 현재 남미 여행 중입니다.

* 희망여행 카페: www.kyulang.net

* 희망여행 저서: 대한민국 청년 박정규의 '희망여행'
#안데스 #뽀루띠죠 #안데스스키장 #안데스자전거여행 #남미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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