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시 '타향살이' - 논현동 방화살인 사건에 애도를 표하며

등록 2008.10.22 18:42수정 2008.10.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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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지조차 못할 만치 오목가슴이 저려 옴을 느낍니다. 식도염으로 한 달 가까이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함을 느껴왔던 탓도 있지만, 지인이 보내 온 메일 내용은 막힌 가슴을 더욱 꽉 막히게 하며, 명치 위를 지그시 눌러 얹은 손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려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화려한 도심 한복판
쪽방 고시원에서
방화와 묻지마 살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6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현장에 가 보았습니다.
검게 그을린 건물.
부서진 창문.
공포감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화재가 난 1층 음식점은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밝은 조명 밑에 고기를 굽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계단에는
내동대기 쳐 있는 짐 보따리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가을 저녁 바람이 참 쌀쌀하군요.

여섯 명이 죽고 일곱 명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끔직한 사고에도, 같은 자리에서 밝은 조명을 밝히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세상, 어쩌면 익명성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도시의 일상이겠지요.


아랫집이나 윗집에서 쌀이 떨어졌는지, 집 나간 자식이 돈을 붙여 왔는지 돈을 보내달라는 기별이 왔는지, 심지어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며 지내던 저 먼 산골 촌놈 입장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하고 몸서리칠 만큼 무섭기만 하며, 문득 어릴적 부르던 동요 '오빠생각'이 떠오릅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최순애 작

뜸북새가 막 울어대던 봄에 비단구두 사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던 오빠는 겨울철새인 기러기가 돌아오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는 가을, 그것도 나뭇잎마저 우수수 떨어지는 늦은 가을이 되도 소식이 없습니다.

오빠를 기다리기 위해 나선 꼬불꼬불 마을길은 이미 늦은 가을 가물로 흙먼지가 풀풀 날리며, 바람은 얇은 가을 옷을 파고들어 어깨를 움츠리게 합니다.

80여 년 전 서울인지, 만주인지, 그 어딘가에서 타향살이하는 오빠를 기다리던 동생은 아마 비단구두는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오빠가 건강하게 밝은 웃음을 안고 돌아만 와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다가 오빠가 평생 돌아오지 않기라도 하면 어쩌나, 몸이나 성하게 살고 있나 하는 걱정에 동구 밖을 나서서 눈물 머금고 까치발을 들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2008년 대한민국 서울. 비단구두는 아닐지라도 성한 몸만이라도 돌아올 날이 있기를 기대하던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타향살이-고기복
예년보다 길다는 단풍소식을 들으며
큰 길 한 모퉁이 돌아서는 길
무슨 이유에선지 계절마다 내리침을 당하던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은 자꾸만 담벼락 귀퉁이에 쌓여
갈퀴 없이도 지게 한 발채 얹고 남을 듯하다

도시의 대로를 침노하던 자외선을 간단스레 산산내던
자신만만함은 어느덧
앙상한 바삭거림만 남았던가
낙엽이란 존재는 요즘 같은 도시에선
그나마 대형 쓰레기봉투에 처박히지 않으면
제대로 썩지도 못 한다
행여
발길에 채이면 담벼락 귀퉁이를 벗어나는가 싶다가도
차바퀴 짓눌림에 자빠져 헐떡이는 숨으로 날아오르고
결국
갈퀴질 아닌 빗자루질에 쓸려 쓰레기차에 처박히는 게 요즘 신세다

쓰잘 데 없는 가시조차 머리에 이고 갔던 젊은이의 심성이 그리운 길
비도 개이고 바람도 잦았는데
간밤 비 타작에 향방을 알지 못하고 떨어진 낙엽이
마냥 차바퀴에 밟히고
행인들의 발길에 채이는 거리에서
발등에 떨어진 젖은 낙엽조차 버거운 이주민은
발등에 올려졌던 낙엽을 털며
이천년 전 나무를 지고 갔던 제 또래의 젊은이를 떠올렸다

인적 드문 두메산골인들 밟히지 않으랴만
밟히고 밟혀도 제대로 썩을 수조차 없어
제 마지막 안식처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발길에 채인 낙엽은 그래도 썩을 곳을 찾아 뒹굴고
도로변 구두가게 늙은 점원이 굽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고 있다

* 발채: 지게에 짐을 싣기 위해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조개 모양의 물건
#뜸북새 #타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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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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