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노래책에 실린 이애리수의 사진
이준희
조선이 망한 1910년에 태어나,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극단 신극좌(김도산 조직)에서 무대 인생을 시작하고, 1932년에 한국 대중가요 사상 불후의 작품으로 꼽히는 <황성의 적(황성 옛터)>을 발표한 뒤, 1935년 두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끝으로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버린 여인. 그 이애리수(본명 이음전)가 98세 고령으로 경기도 일산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기사가 10월 28일에 나왔다.
1960년 12월 잡지 기사에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낸다는 짤막한 근황이 소개된 이후 공식적으로 확인된 소식이 없었기에,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요즘은 거의 당연시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를 처음 접한 뒤 느낀 놀라움, 반가움, 당혹스러움은 그래서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 돌아온 격 아닌가.
최초의 '한류' 이애리수, 살아있었다니...개성 소녀 이음전이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극단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한국 희극배우의 원조 격인 외삼촌 전경희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21년 김도산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윤백남이 1922년에 조직한 민중극단으로 옮겼고, 이어 다시 김소랑이 이끄는 취성좌에 입단하면서 이음전, 아니 이애리수는 본격적인 배우 겸 가수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이애리수는 <부활>의 주인공 카추샤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가수로서 이애리수는 막간의 꾀꼬리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1929년에는 막간에 나와 노래를 부르기로 한 이애리수가 출연하지 않자 연극보다 막간에 관심을 보이며 관람하러 온 관중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공연이 중단되고 경찰이 출동하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9년 말에 취성좌가 해산하자 이애리수는 1930년에 신설 극단 조선연극사로 옮겼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연극에는 제대로 출연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대에서 인정받은 노래 실력으로 첫 음반을 녹음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1930년 12월 말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메리의 노래>와 <라인강>은 이애리수의 이름으로 나온 첫 음반이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음반이 한창 팔리고 있던 1931년 이른 봄, 콜럼비아레코드의 경쟁사인 빅타레코드에서 음반 기획을 담당하고 있던 이기세는 사석에서 직접 이애리수의 노래를 들어 본 뒤 그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기세의 주선으로 바로 빅타레코드에서도 녹음을 한 이애리수가 그 해 여름에 첫 작품으로 발표한 곡들이 <오동나무><강남제비><방랑가> 등이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한편 1931년 7월에 극단 연극시장에 가입하고, 1932년 3월에 극단 태양극장(태양극단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기는 등 배우로서도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으나, 이애리수의 인기는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더 높이 치솟고 있었다. 1931년 가을 이후 빅타레코드에서만 음반을 발표한 이애리수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곡이 바로 1932년 3월 말에 발매된 <황성의 적>, 즉 <황성 옛터>이다.
<황성의 적> 외에도 1932년에 <고요한 장안>, <에라 좋구나>, <군밤타령> 등 히트곡을 연달아 발표한 이애리수는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는 가수가 되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일본에서 '李アリス(리아리스)'라는 이름으로 <あだなさけ(원망스러운 정)>, <月のゆくえ(달의 행방)>, <去りし夢(스러진 꿈)> 등을 발표했는데,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사이조 야소가 <고요한 장안> 곡조에 새로 가사를 쓴 <あだなさけ>는 일본에서도 상당한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최초의 '한류'로도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꽃각시 설움> 이후 사라진 이애리수 조선 연극계와 대중가요계를 모두 석권하고 일본 대중가요계에도 진출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32년 가을, 이애리수에게 운명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이미 첫 번째 사랑에 좌절한 바 있는 이애리수가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을 만큼 모든 것을 건 남자 배동필은, 그러나 법적으로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리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에 빠져든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동반자살 시도였다.
1933년 새해 벽두에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두 사람의 자살 미수 사건은 다행히 부부로 인정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후 이애리수는 연예 활동을 정리하고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1934년 4월 무렵 발매된 <꽃각시 설움> 이후 그가 녹음한 음반은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이애리수가 그대로 순탄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의 운명이 허락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애리수의 이름이 언론에서 사라진 지 1년쯤 뒤인 1935년 5월, 두 번째 자살 시도로 그의 이름은 다시금 충격적으로 지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두 번째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그토록 믿었던 남편과 겪은 불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미 사실상 은퇴를 한 상황이었음에도 1935년 10월에 발표된 가수 인기투표에서 여자가수 부문 7위로 선정된 것을 끝으로, 이애리수는 연예계와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다. 간헐적으로 그의 소식을 전하는 단편적인 기사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카더라' 하는 전설이 되어 갔다.
왜곡된 채 기억되는 <황성의 적>이애리수의 존재가 전설 속에 희미해져 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대표작 <황성의 적> 또한 긍정적으로 보자면 전설로, 부정적으로 보자면 왜곡으로 덧칠되어 갔다. <황성의 적>에 가해진 덧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그 발표 연대와 금지에 관한 사연, 그리고 음반 판매량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