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부터 대부업, 사채까지 다해본 나
돈 떼먹으면 죽인다던 형님도 고맙더라

이자의 늪에서 건진 희망... 개인회생 제도 빨리 생겼더라면

등록 2008.11.17 08:46수정 2008.11.1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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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용불량자였다. 아니, 지금도 비슷하다. 법원에서 채무변제계획을 심의 받아 법원으로 채무를 상환하는 개인회생제도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채권추심을 받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신용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은행연합회에서 특수관리대상이며 공무원이지만 신용카드를 만들지 못한다.


고정적 수입이 없을 때부터 취직하고 나서 만 3년간 급여 압류, 14개월 동안의 개인회생 심의를 거치는 동안 내게 있어서 '경제적 안정'은 정말 꿈 같은 말이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한국에 존재하고 있는 돈 빌리는 온갖 과정을 다양하게 겪었다. 제1금융권인 은행부터 캐피탈·신협, 또 여러 CM송으로 유명한 대부업체들, 그리고 사채에 이르기까지….

은행부터 대부업까지 다해봤다, 그리고 사채...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몇 번의 실패를 겪었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빚을 내어 시장에 있는 속옷가게를 하나 얻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재래시장에는 손님이 말랐다. 사진은 대구광역시 서문시장의 한 속옷가게. ⓒ 문경미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몇 번의 실패를 겪었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빚을 내어 시장에 있는 속옷가게를 하나 얻었다. 제법 목이 좋아서 명절대목이면 동생까지 나서서 이른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양말 선물세트를 신나게 팔아댔다. 하루에 네댓 박스씩 선물세트를 포장해서 손가락이 아팠지만, 이번 가게는 잘 되나 보다 싶어서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IMF 구제금융 위기가 터졌다. 재래시장에는 손님이 말라갔다. 가게에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고, 물품 결제 대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보증도, 담보 세울 집도 없는 어머니보다는 갓 대학에 들어간 내가 대출을 내는 것이 쉬웠다. 은행에서는 딱 등록금만큼만 대출해 주었지만 당시 삼성이나 LG같은 캐피탈들은 학기당 500만원씩, 더구나 중복해서 학자금 대출을 해주었다.


학자금 대출이 아니더라도 협동조합이나 상호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뿐더러, 어머니는 내가 교대를 졸업할 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고 하셨다. 나도 그렇게 믿었고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채 대출서류들에 도장을 찍어댔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이자에 이자가 붙었고 거기에 연체이자가 붙었다. 가게에 있던 어머니의 달력은 칸칸이 갚을 돈이 적혀있었다. 피하는 전화가 많아지는 만큼 어머니의 눈물과 초조함도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도가 났다. 살던 집의 전세금은 바로 압류가 들어왔다. 가게를 빼면서 받을 권리금으로 방 한 칸이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정신없는 통에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았다. 친척도 친구도 등을 돌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상 인심이 그랬다.

당장 내일 식비도 없는 집에 들이닥친 채권자들은 교대 졸업반이던 내게 지불보증을 요구했다. 오전 8시부터 밤 12시까지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400만원이 넘게 벌었지만, 매번 들어오는 동산압류(집에 있는 가구집기에 대한 압류)에 이자를 되는대로 해결하다 보면 생활비로 남는 돈이 없었다. 전기가 끊기고 가스가 끊기기도 일쑤였다. 이사를 하고 숨어살기 시작했다.

종일 일해서 이자 메우던 대학생, 그렇게 꿈꾸던 교사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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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논란이 됐던 유명연예인들이 출연한 대부업체 TV 광고. 합법업체들 역시 법정최고이율인 연 66%에 육박하는 높은 이자를 요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래도 나는 '교원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교사가 되면, 희망이 보이겠지' 하면서 희망을 품었다. 부도와 동시에 휴학계를 내야 했던 동생도 "언니는 우리 집 희망이잖아"라고 했다.

하지만 교사가 되자마자 급여압류가 시작됐다. 다행히 참여정부에서 새로 제정한 법(급여압류에 관한 새로운 규정) 덕분에 월급의 반 정도는 내 손에 떨어졌다. 그래도 대도시에서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데 만만찮은 돈이 들었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계의 구멍을 메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학교로 채권자들이 찾아오고 시작했고, 차비가 없을 때도 있었다. 개인회생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법무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데에도 상당한 돈이 들었고, 법원에서 최종 승인을 받기 전까지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결국 나는 골목에 뿌려진 사채 명함을 다시 집어들었다.

고금리가 불법인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채업자들은 주민등록등본에 인감증명, 통장내역까지 요구하면서 자신의 이름조차 가르쳐주지 않는다. 고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을 만나는 것도 자동차 안. 나한테 남는 것은 휴대폰 번호 하나와 'O부장'이라는 호칭, 그리고 "내 돈 떼어먹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일 겁니다"라는 협박이었다.

통장과 급여명세서에 '채권 압류'라고 찍히는 나는 일반 사채도 빌릴 수가 없었다. 몇 개의 사채업자들을 만나고 난 후 좀 더 비싼 사채를 소개받았다. 그 전에 만났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날이 서있고 '부장'이 아닌 '형님'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선이자 10%를 뗀 돈을 받았다. 2주 뒤에 10%의 이자를 또 내야 했다.

이상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가 고마웠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내게 돈을 빌려주는 그 사채업자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 돈으로 '급한 불을 끄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힘이 났다.

'개인회생 최종인가' 결정 받던 날, 몸을 덜덜 떨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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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나는 '개인회생 최종인가' 결정을 받았다. 법정에서 없어 보이기 싫어 평소보다 훨씬 신경 썼던 화장도 잊고, 법원 앞 대로에서 몸을 덜덜 떨며 울었다. ⓒ 권우성


그렇게 나는 몇 년에 걸쳐서 힘들게 사채 이자와 원금을 다 갚았다. 그리고, 지난 4월 '개인회생 최종인가' 결정을 받았다. 법정에서 없어 보이기 싫어서 평소보다 훨씬 신경써서 화장도 했지만, 난 그것도 잊고, 법원 앞 대로에서 몸을 덜덜 떨며 울었다.

지금의 나는 급여압류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법원에 상환하고 있다. 하지만 채권추심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변제계획대로 상환하면 끝이 있다는 희망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은 대출기업들도 문제다. 하지만 개인회생과 같은 제도들이 좀 더 일찍 생겼더라면, 혹은 좀 더 그 벽이 낮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사채를 빌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전봇대에 붙은 사채 광고들이 대문짝만 하게 눈에 들어오고 전화번호들을 저장해두는 사람들은 지금도 있다. 그 사람들이 사채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더 낮고 더 많은 길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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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 #개인회생 #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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