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거룩하고 신성한 느낌
.. 바로 이것이 종교적인 감동을 일으키게 하며, 나아가서는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고 본다. 거룩하고 신성한 느낌을 .. <보살의 인생독본(상)>(무샤고오지 사네아쓰/이영자 옮김, 동국대학교부설역경원,1981) 17쪽
“종교적인 감동”이라고만 적어야 하지 않다면, “종교라는 감동”이나 “종교가 베푸는 감동”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 신성(神聖) : 매우 거룩하고 성스러움
│ - 신성을 모독하다 / 이 노학자의 백발에서 더 많은 신성을 느낀 듯했다
│
├ 거룩하고 신성한 느낌을
│→ 거룩한 느낌을
│→ 거룩하고 대단하다는 느낌을
│→ 거룩하고 훌륭하다는 느낌을
└ …
‘거룩하다’ 하나만 적어도 되겠지요. 힘주어 말하고 싶다면 “거룩하디거룩한”이나 “거룩하고 또 거룩한”처럼 적고요. 다른 말을 뒤에 붙여서 “거룩하고 대단한”이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이나 “거룩하고 놀라운”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 신성을 모독하다 → 거룩한 얼굴을 더럽히다 / 거룩함을 더럽히다
└ 신성을 느낀 듯했다 → 거룩함을 느낀 듯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토박이말 ‘거룩하다’를 한문으로 옮긴다면 어떻게 적을까 하고. 또한 ‘거룩하디거룩하다’를 한문으로 옮긴다면, 그리고 ‘매우 거룩하다’나 ‘그지없이 거룩하다’를 한문으로 옮긴다면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왜 성전, 성령, 성당, 성경, 성물, 성모, 성탄, 성찬, 성지…라고만 이야기를 할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말로 거룩한 곳, 거룩한 넋, 거룩한 집, 거룩한 책, 거룩한 물건, 거룩한 어머니, 거룩한 나심, 거룩한 저녁, 거룩한 땅 ……이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옮겨낼 수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쓸 만한 우리 말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바깥말은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옮겨내어 나누면 좋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더없이 찬밥 대접을 하고 있지 않는가 궁금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더럽히면서, 우리 말이 거룩해지지 못하게끔 가로막지 않는가 궁금합니다.
ㄴ. 깊고 근원적
.. 필자는 그들의 생태사상이 어떤 생태학자보다 깊고 근원적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알게 되었다 .. <달려라 냇물아>(최성각, 녹색평론사, 2007) 223쪽
‘필자(筆者)는’은 ‘글쓴이는’이나 ‘나는’으로 고칩니다. “그들의 생태사상(-思想)이”는 “그들이 생태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그들이 생태를 돌아보는 생각이”로 풀어냅니다.
┌ 근원적 : x
├ 근원(根源)
│ (1)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곳
│ - 압록강의 근원은 백두산이다
│ (2) 사물이 비롯되는 근본이나 원인
│ - 생명의 근원 / 소문의 근원
│
├ 어떤 생태학자보다 깊고 근원적이라는 것을
│→ 어떤 생태학자보다 깊고 그윽함을
│→ 어떤 생태학자보다 깊고 너름을
│→ 어떤 생태학자보다 깊고 아름다움을
└ …
무엇이 이루어지는 밑뿌리를 가리키는 한자말 ‘근원’입니다. 어떤 밑뿌리라면 아래쪽에 있을 테니 ‘깊은’ 데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깊고 근원적”이라고 하면 겹치기가 되어요.
― 깊디깊음 / 깊고 깊음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자기 생각을 한껏 힘주어 밝히고 싶다면 ‘깊디깊음을’처럼 적거나 ‘깊고 깊음을’처럼 적어 줍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뒤쪽에는 다른 낱말을 넣어서 뜻이나 느낌이 넓어지도록 마음을 기울여 줍니다.
┌ 압록강의 근원은 백두산이다
│→ 압록강 뿌리는 백두산이다
│→ 압록강 물줄기는 백두산부터 뻗는다
├ 생명의 근원 → 생명이 나는 뿌리 / 생명이 비롯되는 밑뿌리
└ 소문의 근원 → 소문이 나온 곳 / 소문이 생긴 데
한자말 ‘근원’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퍽 쓰이고 있는 한자말인데, 이 낱말은 우리 삶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낱말을 써야만 우리 생각을 나타낼 수 있을지, 우리가 이 낱말을 안 쓰면 우리 마음이나 뜻을 나타낼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압록강 물줄기는 백두산부터 이어집니다”라 말하기만 해도 넉넉하고,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궁금합니다”라 말해도 넉넉하며, “소문이 (처음) 난 곳을 알아야겠다”라 말해도 넉넉합니다.
흔히들 ‘우리 말 뿌리’는 거의 한자에 있는 듯 말합니다만, 우리 말 뿌리가 한자에 많이 기댄다기보다, 옛날 학자와 선비들이 쓰던 한문을 여느 사람들(백성이나 서민) 말인 토박이말로 담아내거나 옮겨내지 못한 가운데, 백성들 말과 서민들 말을 짓누르거나 얕보는 탓에, 자꾸자꾸 토박이말 밑뿌리가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고, 우리 손으로 우리 말 뿌리를 튼튼히 가꿀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 어느 한곳도 제대로 쓰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말이 찌들거나 무너지거나 흔들리거나 뒤집혀도 딴청을 피웁니다. 팔짱을 낍니다. 고개를 돌립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8.11.19 11:01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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