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더 달콤하다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 해 편 22 - 쿠바 22] 쿠바 메야(Mella)

등록 2008.11.26 15:15수정 2008.11.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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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교회 예배 모습. 선교사가 오는 건 불법이지만 자체 예배는 허용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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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목사님과 J, 그리고 전도사 ⓒ 문종성


출발하기 전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특이하게도 여자 목사님인 마리아씨가 시무하시는 교회다. "쿠바의 교회는 나라에서 관리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비교적 자유스러우면서도 다른 남미에 비해서는 조용한 분위기다.

찬양연주곡은 경건했고, 내 영혼 그윽히 평안을 느꼈다. 우리는 특별히 예배시간에 소개되었고, 또 그 예배를 함께 드렸다. 어렵지 않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으므로 설교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불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저 사람이 얘기하는 게 무얼까, 오늘 내가 마음에 두고 달려가야 할 것이 무얼까. 일단 교회에서 주는 달디 단 주스 한 잔의 목넘김이 마냥 좋다.

코코넛 한 잔의 위안, 그런데 뭔가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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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가장 좋아하는 코코넛 ⓒ 문종성


아침을 피자 두 조각으로 때우고 출발했다. 오후 1시도 채 되지 않아 물통의 물을 이미 다 비워냈다. 우리는 계속 달렸다. 중간에 여우비를 만났지만 대지 너머 알록달록 그려진 무지개를 바라보며 힘을 냈다. 유난히도 언덕이 많았는데, J는 예전 같지 않게 잘 넘어왔다. 막판으로 갈수록 다리 근육에 힘이 붙은 것이다.

"코코넛 먹고 가요!"

무료하게 라이딩을 하고 있을 무렵, 길 중간에 코코넛 파는 아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오토매틱 브레이크가 작동됐다. 산적들이나 쓸 법한 대도(大刀)를 몇 번 샤샥 휘두르더니 금방 꼭지에 알맞은 구멍이 뚫렸다. 더위 때문에 갈증 난 목을 축이는 데 코코넛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J는 아예 코코넛에 얼굴을 파묻을 듯한 기세로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먹는다.


하지만 달짝지근한 코코넛이라도 시원함이 없고 양이 적어 순간적 일탈감만 줄 뿐이다. 그리고 콜라에 길들여진 난 코코넛 따위의 당도는 그다지 마음에 차지도 않는다. 다만 수많은 음료 중에서도 코코넛을 최고로 치는 J의 흡족한 표정이 위안이 된다.

정신을 맑게, 산뜻하게 해주는 음료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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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를 기계에 넣고 즙을 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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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음료 무척 달고, 시원하다. ⓒ 문종성


날이 더울 때는 대책이 없다. 아스팔트 도로라는 것을 고려해 온도가 40℃이 넘으면 그늘을 찾든지 물로 배를 채우든지 해야 한다.

이럴 땐 제 아무리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가게라도 사막의 오아시스요, 가뭄에 단비가 된다. 그 곳에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음료가 고급식당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 맛있다면 여행을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다. 열정을 다해 고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행 중간중간 자주 마시는 즉석 가내수공업용 주스는 쿠바 음료의 젖줄이다. 분말을 뿌려 만드는 저질 주스도 있지만 망고나 수박 등 과일을 직접 갈아서 만드는 고급 주스도 더러 있다. 가격까지 똑같으니 당연히 후자 '윈'!

쿠바 횡단을 거의 마쳐갈 무렵, 또다른 신기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과일 주스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신을 맑게 산뜻하게, 그리고 에너지가 마구마구 분출되게 만들어 주는 음료를 대한 것이다.

'흐미, 무지하게 단그~.' 그렇다고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로 사탕수수 음료다. 아바나에서 드문드문 보긴 했지만, 시골에서 처음으로 마시는 사탕수수 음료 한 잔은 나를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했다. 직접 사탕수수를 갈아서 설탕을 듬뿍 넣어주는 한 잔의 여유.

일반 주스보다 당도도 훨씬 높고 시원하면서, 양도 두 배나 많다. 우리는 정신없이 들이켰다. 철제 컵 하나에 족히 400㎖는 담아내 두 컵만 마셔도 배가 부른데, 네 컵을 아무 어려움 없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어지간히 지치고 더웠을까. 뻘겋게 익은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 유일한 기쁨은 바로 속이라도 시원하게 해갈하는 것이다.

쿠바의 과일주스는 '과일 반 설탕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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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켜봐요 비가 오는 사이 잠시 들른 집 주인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 쿠바 시골엔 라디오만이 유일한 정보통인 곳도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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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사진을 찍자 의식한 아저씨. 다시 옷과 모자를 걸치고 나와 진지한 표정으로 라디로를 듣는 모습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 문종성


당도는 사탕수수 음료>과일 주스>커피>코코넛 순이다. 자체 당도는 도무지 무엇이 더 높은지 모르겠다. 물을 제외한 쿠바 음료에는 모두 설탕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이를테면 단위 용적당 가장 적은 설탕이 들어가는 건 커피다. 커피 한 잔에 두 스푼 정도 들어가면 꽤 감칠맛이 난다. 사탕수수는 그 자체로 이미 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 걸, 설탕도 엄청나게 뿌려 댄다. '설탕 따위야 손님을 위해서라면' 하듯 아낌없이.

과일주스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을 본다면 치과 의사들의 표정이 어떻게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몇 번 즉석 제조과정을 살펴본 결과, 황망하게도 과일과 설탕의 비율이 6:4나 7:3 정도 섞였다. 게다가 어떤 집은 과일 반, 설탕 반! 설탕으로 맛을 조금 더 돋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재료로 넣는 것이다.

이 설탕을 향한 쿠바인들의 애정은 열렬하기만 하다. 과거 쿠바의 주력 수출품은 사탕수수(설탕)였다. 18세기에 사탕수수 생산량을 점차 늘리면서 그 유명하다는 쿠바 담배를 대체해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작물이 되었다.

급기야 1970년에는 무려 1000만톤의 설탕을 생산해 쿠바 경제에 일대 대변혁을 가져왔다. 설탕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도가 세워지면서 교통시설 발전을 가져오는 등 관련업 성장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활기를 띠었다.

쿠바는 섬나라라는 지리적 핸디캡이 있었고, 미국과의 단절 이후 자원의 상대적 박탈감을 겪었다. 그에 비해 사탕수수만큼은 천년만년 천하태평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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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쿠바 설탕산업의 영화를 함께 누린 길. 경제낙후와 함께 지금은 이 길이 초라해 보인다. ⓒ 문종성


경제적 불황을 타개할 정치력과 기술력이 제자리걸음인 상태에서 쿠바의 설탕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넓디 너른 사탕수수밭 옆에 놓인 철로를 보며 옛 영화를 잠시 감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1100만 국민을 책임질 내수용 설탕은 여전히 풍족하다. 쿠바 어디를 가든 양과 질 모두 동급최강 조미료로 손색이 없을만큼 인정받고 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설탕을 생산해내는 쿠바는, 다른 조건을 덮어놓고 보면 나 같은 설탕귀신에겐 낙원같은 곳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모든 음식에 무조건 보조를 맞춰야 하며, 무력함·소화불량·배앓이·두통 등 아픈 곳도 단칼에 해결해주는 나의 만병통치약 콜라의 존재를 잊을 만큼 강렬한 단맛을 주는 쿠바 음료에는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고 있다.

나는 갈증을 풀고, 쿠바 국민들은 생계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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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끝과 또다른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 문종성

너무 달아 건강이 염려되지만 그걸 알면서도 중독처럼 다가간다. 입자 하나하나가 결고운 백색보석의 빛을 가졌다면 염치없는 과장일까?

입에 털어넣는 순간 땀과 바꾼 달콤한 맛에 쿠바 농민들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도 동시에. 사탕수수의 나라에서 마시는 단 것, 더 단 것, 아주 단 것으로 오늘도 나는 갈증을 해소하고 쿠바 국민들은 생계를 이어간다.

참, 도대체 쿠바 과일 주스가 얼마나 다냐고? 과감히 추천해 본다. 그걸 마시고 난 다음 콜라를 마셔보시라. "콜라는 맹물에 탄산만 채워진 불량품"이라며 인상을 찌푸릴지 모른다.

쿠바 주스는 들이키지도 않고 "콜라는 너무 달아, 설탕 덩어리야"라고 말하는 것은 공 한 번 안 던지고 "선동열 슬라이더는 너무 밋밋해, 배팅볼이야"라고 하는 마인드라고만 조용히 일러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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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최근 도전과 열정, 감동의 북미 대륙횡단 스토리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를 발간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최근 도전과 열정, 감동의 북미 대륙횡단 스토리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를 발간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세계일주 #라이딩인아메리카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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