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공포 못이기면 가스총도 소용없다"

[인터뷰] 페미니스트 자기방어 훈련 강사 허은주씨

등록 2009.02.07 11:58수정 2009.02.0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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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방어훈련을 맡고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키라'.
자기방어훈련을 맡고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키라'.권박효원

'호신용 호루라기·경보기·전기충격기 등이 불티나게 팔린다', '온라인쇼핑몰에서는 하루 평균 호신용품 판매량이 60%나 늘었다', '한 이동통신사 위치추적 서비스 신규 가입도 지난 12월 2만5000건으로 급증했다'

잇다른 언론 보도처럼 호신용품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여성들의 귀가 시간이 빨라졌다. 경기서남부 연쇄살인사건 때문이다. 여성들이 되도록 일찍 퇴근하고 야근이나 술자리 등으로 귀가가 늦어지면 남편이나 애인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여성들의 이같은 자구책이 성폭력 예방에 도움이 될까?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기방어훈련을 맡고 있는 '키라'는 "호신용품이 있다고 힘이 생기는 게 아니다"고 말한다.

"사실 호신용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산이나 휴대폰·볼펜처럼 갖고있던 물건으로도 급소를 찌른다든지 해서 호신할 수 있다. 그런데 활용을 못한다. 가방에서 가스총을 꺼내려면 판단력과 경험이 필요하고, 성폭력의 공포에 억눌리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가스총이 있었는데도 상대방의 공격성을 더 자극할까봐 꺼내지도 못했던 사례도 있다. 공포스러운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지 않다가, 막상 닥치면 얼른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 바라고 제대로 대처를 못하는 것이다."

'키라'는 여성주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별칭. 호적상의 이름은 '허은주'지만, 이 인터뷰에서는 본인의 뜻에 따라 '키라'라는 이름을 썼다. 키라는 2년째 태권도·태견을 배운 유단자이지만 "잘하지 못해서" 단수는 비밀이라고 귀뜸했다. 6일 오전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성폭력상담소 사무실에서 키라를 만나 여성들의 밤길 안전대책을 물어보았다.

'연약한 몸'에서 벗어나야 스스로를 지킨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기존의 호신술과는 다르다. 치한을 물리쳐 여성의 '정조'를 지키자는 게 목적이 아니다. 성폭력 등 외부 공격에 취약한 '여자다운 몸'을 스스로 신체적 방어가 가능한 '자유로운 몸'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즉, 여성에 대한 성역할 규범도 변화시킨다는 개념이다.


"누군가 나를 공격했을 때는 분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여성들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지, 소리 지르면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자기검열을 한다. '예의바르고 착한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통념 때문이다.

연약하고 마른 여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도 넘어서야 한다. 자기방어훈련을 하는 여성이 많이 듣는 이야기가 '왜 여자이길 포기하냐'는 것이다. TV에서도 덩치가 크고 남성만큼 힘센 여성은 개그의 소재가 된다. 귀엽고 예쁜 김신영씨, 근육이 튼튼한 조혜련씨는 참 보기 좋은 여성인데 왜 자꾸 그 몸이 유머 코드로 쓰이나."


키라는 "이것은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다, 기술을 몰라도 자기방어 마인드가 있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여기에 기술까지 배운다면 더 성공적이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기방어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 안전을 맡기다보면 여성의 자아존중감도 낮아진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상담소의 자기방어훈련은 호신술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법과 여성다움의 편견을 깨는 법도 배우는 과정이다. '연애문화 속 다른 몸 되기' '다른 몸의 여성 만나기' 같은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지난해 7월 4일 열린 여성단체들의 달빛시위. 여성들은 마음놓고 밤길을 다닐 자유를 요구했다.
지난해 7월 4일 열린 여성단체들의 달빛시위. 여성들은 마음놓고 밤길을 다닐 자유를 요구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


물론, 기본적 내용은 몸 훈련이다. 몸을 직접 움직여봐야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방법으로 싸울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몸에 익어야 자신감도 붙는다. 또한 몸의 훈련을 거치고 나면 자기가 있는 공간이 실제로 위험한지 아닌지 바로 구분할 수 있고, 폭력적 상황에서도 판단이 빨라진다.

키라는 "여성들은 실제로 맞거나 때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폭력의 공포도 실제보다 더 크게 느낀다, 피가 나고 다쳐도 회복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자기방어 훈련이 오히려 '끝까지 저항하면 성폭력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왜 그러지 않았냐'는 식으로 피해자 책임론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키라는 "맞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자기방어는 끝까지 저항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몸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목표다. 예를 들어 10명이 달려드는데 싸운다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방어를 잘못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물리적 저항을 포기하는 것도 자기방어의 한 방법이다.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서 가해자를 잘 설득해 콘돔을 사용하게 한 여성도 있었다. 임신과 성병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킨 훌륭한 자기방어다. 강간은 그냥 피해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죽을 때까지 저항해야 하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장나기 때문에? 남성들의 판타지일 뿐이다."

목숨걸고 정조 지켜라? 때로는 포기도 자기방어

자기방어훈련이라는 이름으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 곳 밖에 없다. 상담소는 부정기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데,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10주 코스의 '주말도장'이나 1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3박4일의 소녀캠프 등이 있다. 그러나 올해는 프로그램 운영계획이 없고 대신 그동안의 훈련들을 매뉴얼로 정리할 예정이다.

상담소를 찾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자기방어를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키라는 "6개월만 매일 무술도장에 나가보라"고 말했다. 몸을 변화시키는 데는 꾸준하게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무술도장이 힘들면 일단 다른 운동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그것도 어려우면 여성 스포츠 경기라도 많이 보자. '말라빠진 연예인'이 아닌 '건강한 선수'들의 몸이 얼마나 멋있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마음 훈련도 필요하다. 남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여자로서 사랑받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 남성에게는 무조건 기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지 말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성폭력 상황에 용감하게 대처한 무용담을 여성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키라는 이번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사회 분위기가 공포를 조장하는 모습으로 문제의식 없이 흘러간다"고 지적했다.

피의자 강아무개씨가 진짜 사이코패스인지, 그의 얼굴을 공개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가해자 몇명을 색출하는 것보다 '여성의 몸은 무기력하다'는 통념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는 언론보도를 보면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아무 의도 없이 밤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여성에게 치한으로 오해받았다"며 불쾌해 하는 남성들에게도 "기분은 나쁠 수 있다"며 "그러나 일상 공간에서 공포나 불안을 느끼는 여성의 입장과 감수성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경기서남부 연쇄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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