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2.18 10:00수정 2009.02.18 10:00
스키장 가서 스키 탈 생각은 하지 않고 산에 오를 생각을 한다면 우습게 들리려나? 나는 운동신경이 좀 둔한 편이다. 스키는 처음 배울 때부터 겁이 났다.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몇 차례 스키장을 찾았지만 늘 뒷전이었다. 되레 산행을 즐기는 게 편하였다.
지난 주말(14일). 강원도 홍천으로 여행을 떠날 때, 스키를 탄다는 즐거움에 한껏 부풀어 있는 동료들과는 달리 나는 애초부터 산행을 하고 싶었다.
함께한 일행들 중에서 다행히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산에 올라 봄 마중이나 합시다."
"벌써 봄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입춘이 지난 지 언제인데요. 봄이 오고 있을 겁니다."
우리 일행은 홍천군 9경 중 으뜸이라는 팔봉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젠장! 팔봉산은 입산통제를 하고 있었다. 산림도 보호하고 겨울철 산악안전을 위해 산행을 가로막았다. 이럴 땐 어쩌지! '꿩 대신 닭'이라고, 다른 산행 코스를 잡을 수밖에. 그런데 우리 일행들이 묵은 숙소 바로 옆에 아주 멋진 산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홍천에는 스키장도 있고, 두능산도 있다
이름 하여 두능산(斗陵山)! 해발 595m의 나지막한 산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언덕 '능(陵)'자가 들어간 산이어서 그런지 산세가 그리 험해 보이지 않는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는 주변사람들의 권유에 우리는 발걸음도 가벼운 출발을 했다.
산길이 잘 정돈되었다. 아담한 산인데도 오르는 코스가 다양하다. 아마 스키장 리조트가 있는 곳이라서 잘 가꿔놓은 듯싶다.
우리는 제일 긴 코스인 A코스를 선택했다. 두능산을 멀리 돌아 정상을 오르는 코스이다. 3.5km 산행에 2시간 정도 걸린다. 여기에 비해 B, C코스는 정상으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약 2.5㎞로 등산을 즐기기에는 거리가 짧다. D, E코스는 리조트를 좌우로 둘러싸고 있는데, 각각 1.5㎞와 1.0㎞로 아침 산책 코스로 알맞을 것 같다.
고즈넉한 계곡에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두꺼운 얼음 밑이지만 경쾌한 봄의 소리가 느껴진다. 마침 안개가 낮게 깔려 산길이 호젓하다. 물소리를 들으며 뒷짐을 지고 걷는 일행들의 발길에 한결 여유가 있다.
산길에 나무 계단이 있어 편안하다. 그런데 조금 오르니 군부대 유격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물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회사나 단체에서 리조트에 묵으며 단합대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이용하라고 마련한 것 같다. 등산길에서 마주친 유격장 같은 시설물이 좀 생뚱맞다.
"자! 제가 시범을 보일게요! 저를 따라 한 번 따라 해보시죠?"
앞선 일행 중 한 명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구조물을 쉽게 넘는다. 나도 따라 해보는 데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이런 시설물을 통한 체력단련으로 모험과 도전정신을 키우고, 동료간에 우정과 사랑이 더 돈독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에게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이라면 마뜩찮게 여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행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는 것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유격장 시설물을 벗어나자 산세가 한층 가팔라진다. 모가 나지 않은 바위들이 정겹다. 이불처럼 산을 덮고 있는 낙엽이 겨울 산의 운치를 자아낸다.
두능산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새 등줄기가 흥건하다. 숨이 턱에 차오른다. 뺨에 부딪치는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훈풍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산행의 즐거움이 묻어난다.
야생화에 관심이 많은 일행이 풀 하나를 가리킨다. 궁금하다. 산에 와서 자연을 알면 색다른 묘미가 있다.
"이게 뭔 줄 아세요?"
"처음 보는데요. 약초인가요?"
"이게 삽주라는 식물이지요."
"삽주요?"
바짝 마른 삽주 한 그루가 가느다란 몸을 흔든다. 겨우내 모진 바람에 색은 바랬어도 씨방과 꽃받침 모습을 원형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신비롭다.
삽주 어린잎은 봄철에 고급 산나물이란다. 삽주 뿌리는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시력을 좋게 한다고 한다. 또한 감기 및 두통을 낫게 하며 혈액순환에 약효가 있다는 설명이다.
일행들이 이곳저곳 봄의 향기를 찾느라 부산이다. 그러다 좀 전 삽주를 찾은 일행이 또 뭔가를 발견한 듯 말을 잇는다.
"어! 양지꽃 새순이 올라오네요! 요 녀석, 어떻게 봄이 오는 것을 알아차렸지! 얼마 있어 노란 꽃을 피워 멋진 자태를 뽐내겠구먼."
양지바른 곳에서 낙엽을 뚫고 올라온 파란 새싹이 보인다. 양지꽃 새순이다. 반갑기 그지없다. 자연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에게 봄을 선물하고 있다. 봄은 한 발짝 다가서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약간 질퍽거리는 바위 틈새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이파리들이 부대끼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끼들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는데 느낌이 참 보드랍다.
나뭇가지에 새 움들이 도톰히 살을 찌우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생명들의 힘찬 함성이 들리는 듯싶다.
나이가 제일 어린 일행이 내게 묻는다.
"선생님, 이 나무가 무슨 나무죠? 눈이 곧 터질 것 같아요."
"그거 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시죠?"
"생강냄새 비슷한데요."
"그래서 생강나무라 합니다. 산수유꽃과 비슷하여 혼동하지요."
생강나무에도 물이 잔뜩 오른 듯싶다. 부풀어 오른 눈이 탐스럽다. 자연에 관심을 가지니 산행이 한결 즐겁다. 다람쥐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재롱을 부린다. 얼마가지 않아 동물의 배설물도 눈에 띈다. 어떤 동물일까? 냄새를 맡아보는데 아무 냄새가 없다. 일행 중 한 분이 배설물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화분에 비료로 쓰면 좋을 것 같단다.
새소리가 제 목소리를 내는 날이 기대된다
두어 차례 쉬면서 오르자 어느새 정상이다. 여느 산에서 볼 수 있는 정상 표지석이 없다. 나무기둥을 박아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편안하다. 준비한 막걸리를 한 잔씩 들이키니 그 맛이 기가 막힌다.
산 아래 펼쳐진 조망도 참 좋다. 산허리를 감싼 갈색 빛을 토해내고 있는 잎사귀들에서 가을의 끝자락을 보는 착각이 든다.
어디서 들리는지 작은 새 한 마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낸다. 스키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소리에 새소리는 금세 묻혀버린다. 목청껏 우는 새소리가 또렷이 들릴 날은 언제쯤일까? 그땐 눈 녹은 따스한 봄날이지 싶다. 한달음에 달려올 봄볕이 그리워진다.
2009.02.18 10:0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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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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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 홍천 두능산에서 봄의 향기를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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