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행진곡 가사
독립기념관홈페이지
<친일인명사전>발간을 향한 국민들의 꿈은 한 여름 꿈처럼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나흘만에 1억원 모금액을 넘어서는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염원을 담은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쌓여 큰 바위를 뚫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5억원도 요원한 꿈이 아니었다.
국민들의 뜨거운 염원을 지켜보면서 내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나도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정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실력 없는 대학생 기자 주제에 <친일인명사전>에 관련된 기사를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관련 기사를 쓰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였다. 유명 인터넷 사이트에 들렀다가 우연히 한 누리꾼이 올린 친일 인명 사전 발간에 동참하자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게시글에서 흘러나오던 배경음악이 귓가를 맴돌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독립 군가였다. 눈물이 왈칵 났다. 얼마나 마음이 찡했는지 모르겠다. 2004년 1월 14일 오후에 찾아온 운명적인(?) 독립군가였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처물리자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우리는 한국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박영만 작사, 한유한 작곡>게시글 밑에는 이 게시글 속 배경음악이 뭐냐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나도 궁금한 마음에 알아보니 이 독립군가의 이름은 <압록강행진곡>이었다. 독립군가가 생소했던 20대에게, <압록강행진곡>의 강건한 음율과 가사는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시글에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함께 있는 사진이 있었고 '독립군진공작전, 팔도 독립군은 거병하라'는 구절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 계좌번호가 씌여져 있었다. 나는 이 <압록강행진곡> 관련 내용을 얼른 기사로 옮겨 썼다. 2004년 1월 14일 오후, <"친일사전 편찬은 독립군 진공작전">이라는 기사제목을 달고, 압록강 행진곡 군가 파일(배경음)을 기사에 넣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했다.
[관련기사] "친일사전 편찬은 독립군 진공작전" (2004년 1월 15일자)그리고 잠시 후, 기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친일인명사전> 성금 모금 열기와 맞물려서 기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던 것이다. 기사 조회수는 6만9천에 달했고 댓글은 250여개나 달렸다. 조금 더 놀라운 사실은 <압록강 행진곡> 군가가 주요 방송 뉴스와 뉴스툰 플래시에도 인용되어 세상에 전파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일 뒤, 모금을 시작한 지 11일 만인, 2004년 1월 19일 새벽 3시, 드디어 <친일인명사전> 모금 5억 돌파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염원이 한데 뭉쳐 기적을 결국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친일인명사전 모금 5억달성 기념 '오프라인 모임'이 울려퍼졌던 <압록강 행진곡>의 그 감동을. 그즈음 시기와 맞물려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압록강 행진곡>을.
돌이켜보면 기사를 쓰고 나서 그때처럼 기분이 뿌듯했던 적은 별로 없던 것 같다.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데 티끌만큼이라도 동참했다는 일종의 참여의식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우리 조상의 독립군가를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그리고 그 독립군가가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을 모금하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기에 <압록강 행진곡>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게 되었다.
암울한 세상, 과거에서 용기를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