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68) 여자사랑 밝힘

[우리 말에 마음쓰기 557] '커밍아웃'과 '성 정체성 밝히기'

등록 2009.02.20 10:07수정 2009.02.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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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히기, 커밍아웃

.. 몇 년 전에 용기를 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어 … 어차피 백인이 중심이고 기준이기 때문에 백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  《참여연대 기획/김진아와 아홉 사람-열정시대》(양철북,2009) 74쪽


“몇 년(年) 전(前)에”는 “몇 해 앞서”로 다듬고, “가장 친(親)한 친구(親舊)에게”는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나 “가장 살가운 동무한테”나 “가장 믿음직한 벗한테”로 다듬어 봅니다. “용기(勇氣)를 내서”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기운을 내서”나 “큰마음 먹고”로 손볼 수 있습니다. “백인이라는 사실(事實)을”은 “백인임을”로 손질하고, “되는 것이죠”는 “되는 셈이죠”나 “되지요”로 손질해 줍니다.

 ┌ coming-out : (상류 계급 여성의) 사교계 정식 데뷔, 데뷔 축하 파티;
 │   《구어》 동성애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
 │
 ├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어
 └ 백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커밍아웃’은 미국말입니다. 이 말이 처음 쓰인 때가 언제인가 궁금하고,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뜻을 가리키는 낱말로 그대로 미국말을 쓸는지, 아니면 자기네 말로 옮기어 나타낼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미국말이고 일본말이고 중국말이고 가리지 않고 씁니다. ‘세계화’도 아닌 ‘글로벌’ 세상이기 때문이기에 토박이말만 쓸 수는 없다고들 하는데, 나라밖 사람하고 만나는 자리에서야 마땅히 서로 알아들을 만한 말을 써야 할 테지만, 나라안 사람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구태여 미국말이고 일본말이고 중국말이고를 써야 할 까닭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나라안 우리들끼리 미국말로 늘 이야기를 나누도록 버릇이 되어야 나라밖 사람을 만날 때에도 미국말이 술술술 나오지 않겠느냐 생각하는지 모르지요.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인천시장이 인천시민 모두한테 ‘영어는 외국어가 아닌 우리 말이다’고 외치면서 모든 사람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간판도 영어로 바꾸고 서류도 영어로 함께 쓰도록 부추깁니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까지 동네 사람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강좌를 열면서, ‘영어를 더 잘 알게 된 다음 우리가 맛보거나 누리거나 빚어낼 문화’란 무엇인지는 아직 한 가지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미국 영화와 연속극을 자막 없이 보자면서 미국말을 가르치지는, 그리고 미국 영화와 연속극만이 ‘문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궁금하군요.

 ┌ 동무한테 내가 동성애자라고 말했어
 ├ 동무한테 내 성 정체성을 밝혔어
 ├ 동무한테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밝혔어
 ├ 동무한테 나는 남자사랑은 못한다고 밝혔어
 ├ 동무한테 나는 여자사랑을 한다고 밝혔어
 └ …


저녁에 먹는 밥은 ‘저녁’입니다. 이를 ‘만찬(晩餐)’이라 한들 밥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디너(dinner)’라 한다고 더 맛있어지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자동차’이지 ‘카(car)’라고 하여 더 날렵해지거나 빨라지지 않습니다. 열쇠는 ‘열쇠’일 뿐, ‘키(key)’라고 해서 무엇이 남다르게 될까요. 잘했으니 ‘잘했다’고 합니다. 좋으니 ‘좋다’고 합니다. ‘굿(good)’이라고 말해야 한결 멋있고 즐겁고 훌륭하다고 느껴질까요.

무대에 처음 나오는 이들은 ‘처음 나오는’ 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처음 나오다’라 말하는 이는 몹시 드뭅니다. 한결같이 ‘데뷔(debut)’만 말합니다. 지난날, 노래를 손수 짓고 부르던 사람을 두고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라 했는데, 왜 우리는 우리 말로 ‘노래를 짓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이름붙이지 못했을까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노찾사’라 줄여 말하듯, ‘노짓사’나 ‘노짓부사’처럼 줄여 말할 생각은 왜 못했을까요.


 ┌ 밝힘 / 밝히기
 ├ 성 정체성 밝히기 / 동성애자 밝히기
 ├ 여자사랑 밝히기 / 남자사랑 밝히기
 └ …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은 속속들이 우리 삶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다움을 버리거나 잃으면서 남다움으로 흐릅니다. 이제는 남다움으로 흐르는 삶이 다름아닌 우리다움처럼 되고 있으며 뿌리를 내립니다. 나 다르고 너 달라 서로 다르고, 서로가 다름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며 어깨동무를 하던 흐름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내가 남자로서 남자사랑을 하든, 남자로서 여자사랑을 하든, 남자로서 모둠사랑을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느 여자가 여자사랑을 하든, 남자사랑을 하든, 모둠사랑을 하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는 그대로 아름답고 반갑고 좋습니다. 삶이란 다 다르기 마련이고, 이렇게 다 다른 삶을 나타내자면 말도 때와 곳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자리에 알맞춤하도록 이러한 말을 빚고, 저 자리에 걸맞도록 저러한 말을 짓습니다. 이 물건에 들어맞는 이 이름을 붙이고, 저 물건에 알맞는 저 이름을 답니다. 붓으로 그려 붓그림이 되고 연필로 그려 연필그림이 되고 물감으로 그려 물감그림이 됩니다. 길게 써서 긴소설이 되고 짧게 써서 짧은소설이 됩니다. 손바닥만큼만 쓰면 손바닥소설이 될 테지요.

우리 깜냥껏 우리 터전을 북돋우는 우리 말을 빚어내기 정 어려울 때 비로소 바깥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입니다. 들온말로 받아들인 뒤 토박이말로 굳힐지 아니면 우리 깜냥껏 새로 토박이말을 빚어낼지는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살핍니다. 이러는 사이 저절로 토박이말로 굳어지기도 하고, 먼 뒷날 우리 슬기를 빚내면서 새말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말이란 그렇고 생각이란 그러하며 삶이란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이 말 저 말 가리지 않고 들여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알맞는지를 꼼꼼히 살피고 들여와야 하는 말입니다. 밥상에 차린다고 아무 먹을거리나 집어먹을 수 없어요. 먹고살기 팍팍하다고 군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가 사람 죽이는 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어요. 또는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환경을 더럽히는 공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없어요.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제대로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는 밥을 먹을 노릇입니다. 돈 한 푼을 벌어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돈을 벌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 마음과 생각과 넋이, 삶과 일과 놀이가, 그리고 말과 글과 이야기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모두 한동아리입니다. 한동아리 흐름이 어긋나게 하거나, 한동아리 흐름을 가꾸지 않고서야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서로서로 오붓하거나 즐겁게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 자그마한 구석을 알뜰히 가꾸는 동안 우리 삶 모두 알뜰히 가꾸게 되고, 말 한 마디 자그마한 대목이라고 업신여기며 내팽개치면 우리 삶 모두 대충대충이 되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업신여기는 셈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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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커밍아웃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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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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