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K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주로 시내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전철의 편리함을 몰랐었다. 그러다가 수원에 있는 S그룹 회사에 합격해 다니게 되면서 전철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회사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수원역까지 전철을 이용하지 않고 제 시간에 회사에 도착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철을 기다릴 때 담배를 피우던 기억이 난다. 담배 피우는 게 마치 어른이 된 사람의 권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줄담배를 피워 댔다. 그러다가 전동차가 오면 담배를 피우던 채로 올라탔다. 하기야 시내버스 안에서도, 고속버스 안에서도, 여객기 안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 전철 전동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시절만 해도 대기업 합격자 제출 서류에는 신원보증서라는 게 있었다. 신원보증인의 자격도 자격이지만, 합격자가 근무 중에 일으킬 수 있는 금전 사고 등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보증인이었기 때문에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써주지 않는 게 통례였다. 그래서 그런 보증인이 없을 때는 대신 신원보증을 해주는 보험까지 있었다.
그게 연대보증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더불어 마침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 오던 아저씨 한 분이 보증을 서 주셨다. 작은할머니와 친척 간으로 '원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이었다. 강원도 춘천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 방학 때 서울에 놀러 왔다가 춘천에 돌아갈 때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시며 기차 안에서 맛있는 연양갱이나 삶은달걀이나 음료수도 사주시곤 하던 분이었으므로 아주 가까웠다. 친조카처럼 아껴 주셨다고나 할까.
대기업에 다니게 되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나는 7시쯤 된 이른 시간에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숭인동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전동차에 오른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신설동역이었다. 나는 무심코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빈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수원역에 도착한 나는, 입사한 뒤로 며칠 동안 그랬던 식으로 회사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보폭을 넓히고 빠르게 걸었다. 그래서 간신히 회사 버스에 오를 수 있었으며 늦지 않고 제 시간에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할까? 뭔가가 내 몸에서 한 덩어리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아차 싶었다. 신원보증서를 포함한 입사서류가 든 서류봉투를 선반 위에 놓고 내렸던 것이다. 수원역에 연락해 보았지만 "유실물로 들어온 서류봉투는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사실을 고백하면 엄한 성격의 아버지에게 혼이 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원보증서에 아버지의 친필과 날인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신원보증서가 포함된 입사서류 봉투를 잃어버렸다고 아버지에게 고백을 했고 꾸지람과 함께 양 팔을 들고 벌을 서는 등 크게 혼이 났다.
'원씨 아저씨'는 그 소식을 듣고는 다시 신원보증서에 주소와 이름을 써주고 도장을 찍어 주셨다.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출근할 때 선반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런데 관리부 사무실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생산부 여직원이었다.
"이거 잃어버리셨죠?"
그녀가 내민 서류봉투는 바로 며칠 전에 전동차 선반 위에 놓고 내린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마침 총무과에서 생산직 사원 인사 담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산부 여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반 위에 있길래 제가 갖고 내렸다가 주인을 찾아서 돌려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 서류봉투를 습득한 바로 그날 돌려주지 않았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돌려준 것이 고마웠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전철을 이용하다가 물건을 놓고 내리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유실물센터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행히 찾는 사람도 있겠고 누군가가 습득하여 유실물센터에 맡겨놓지 않아서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도와준 두 번째 생산부 여직원
그때뿐만 아니다. 바로 그 해에 전동차 선반 위에 한 번 더 서류봉투를 놓고 내린 적이 있다. 그때는 서류봉투에 내가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공모'에 응모하려고 써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 요즘처럼 PC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육필로 써놓은 원고를 잃어버리면 더 이상 재생할 길이 없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퇴근 후에나 공휴일을 이용해 글쓰기를 즐기던 나는, 마음먹은 대로 써지지 않는 서툰 문장력으로 힘겹게 만들어 낸 글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므로 너무나 속이 상했다. 퇴근할 때마다 포장마차에서 안주도 변변치 않게 시켜 놓고 소주를 들이켜기를 며칠째, 어느 날 사무실로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다.
생산부 여직원이었는데, 내가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원고가 든 서류봉투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철 전동차 선반 위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했다. 원고에 내 이름이 적혀 있기는 했지만, 동명이인도 많을 텐데 어떻게 내가 그 서류봉투의 주인일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내가 입사하고 나서 사내 문학 동호회를 만든 일이 있다. 그 생산부 여직원은 그때 회원으로 참가했었다. 이름만 내걸어 놓고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내 이름과 똑같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그 원고를 읽어보니 왠지 내 얼굴이 떠오르더라는 것이었다.
생산직 여사원들의 면접에서부터 병원 신체검사, 입사교육까지 내가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을 좋아하며 시인을 꿈꾸는 그녀로서는 나의 이미지를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1980년부터 30년째 전철을 이용하면서 꼭 두 번 서류봉투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같은 회사에 다니던 생산부 여직원이 습득을 하여 돌려주었다. 시골에서 딸들에게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나 중학교 이상은 공부를 시키지 않던 시절,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설움 받으며 자라난 바로 그 딸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시골에서 서울의 구로공단이나 서울 근교의 공장으로 돈을 벌러 올라오던 시절.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생산라인이나 사원식당에서 나는 그녀들의 순수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내가 잃어버린 아주 중요한 서류봉투를 습득하여 찾아줌으로써 특히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았던 생산부의 두 여직원. 다른 생산부 동료랑 두 명이 부엌도 샤워 시설도 없는 단칸방 한 군데를 자취방으로 쓴다고 해도 한 달 벌이에서 20%는 방값으로 떼어내야 했고 대중목욕탕에도 어쩌다가 한 번씩 갈 수 있으면 다행이었을 물질적으로 가난한 여성들이지만, 그래도 마음씨만큼은 하늘만큼 땅만큼 넓었던 두 여직원. 지금 그녀들은 어느 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제때 결혼을 하였다면 자녀들이 당시의 그녀들만큼 성장했겠지.
중고생이나 대학생을 자녀로 둘 수 있는 나이가 되도록 인연을 만나지 못해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따금 그녀들의 착한 마음씨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철이 들었다면 마음 착한 그녀들에게 프러포즈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런 일이 생기는 행운은 없을까? 자가용 없이 벌써 14년째 인천에 살고 있는 요즘에도 전철은 나의 주 교통수단. 앞으로 전철 전동차 선반 위에 서류봉투를 한 번 더 두고 내렸을 때 그것을 습득하여 돌려주는 혼자 사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가 어쩌면 나의 인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나서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전철 커플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혼여행을 전철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포함하여 잡아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1980년에는 수원역까지만 달리던 전철 전동차가 이제는 천안까지도 기운차게 달리니까, 어려운 시절에 멀리까지만 갈 생각하지 말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2세에게 나라 사랑 정기(精氣, 正氣)도 심어줄 겸 독립기념관과 그 인근 관광지를 신혼여행지로 삼는 것도 그럴 듯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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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 15:5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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