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만큼 민족 단일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라가 있을까. 진위는 둘째치고라도 그 열정만큼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하고, 좀 다른 시각을 지닌 사람들도 한민족에 대한 이상(理想)을 다 내치지는 않는다. 같은 얼굴, 같은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쓰리고 아픈 역사 속 추억들을 안고 같이 살아왔다 여기는 그 처연한 연대 의식은 곳곳에서 얽혀있다.
민족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 여전한 것과 동시에 적어도 시골에서는 다민족 성향이 강해지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주소는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다. 이처럼 뚜렷이 바뀌고 있는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이 여전히 혼란한 길을 오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민족 동일성에 대한 애착이 여전한 현실과 다민족 성향이 뚜렷해지는 현실은 서로 마주치고 또 늘 부딪친다.
하종오 시인은 <아시아계 한국인들>(삶이 보이는 창, 2007)을 내놓을 때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한국계 아시아인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못내 이상해 보이는 아시아계 한국인이라 해야 할지를 놓고 시인은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대개 누군가의 신부가 되어 한국에 오게 된 '낯선 여성'들을 많이 살펴보는 이 시집은 어느새 한국 남자들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흐름은 다시 오랜 한민족 이상향, 유교 배경 위에 고착된 남성 중심의 시선, 조용히 변화하는 한국 가구 구조 이야기들과 얽히고설킨 채 이야기를 넓혀 간다.
다민족 가구를 보는 일이 낯설지 않고 또 여전히 낯선 이중 현실. 내게도 그러하다.
낯익고 또 낯설은 풍경, 다민족 가족 그리고 다민족 이웃
시집 <아시아계 한국인들>은 그 구성이 참 특이하다. 2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 눈길을 붙잡는 부분은 2부이다. 2부는 장시(長詩)다. 시 제목은 '코시안리'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길고 긴 이야기는 마흔 여섯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며 이어져있는 마흔 여섯 가지 이야기 끝에는 '보유補遺-아시아계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을 단 시가 있으며, 이렇게 시집은 말을 맺는다.
'원어原語' '정주민定住民' '모계 혈통' 등등 시집은 낯익은 말들 속에 새로 담기는 여전히 낯선 이야기를 슬며시 집어넣어 우리 시선을 붙잡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불필요한 호기심과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우리 모습을 문득 문득 보게 된다. 우리 머릿속에 자리한 한국인에 대한 그림과 현실 속 한국인을 보는 그림이 서로 여전히 부딪치는 것이다.
동남아인 두 여인이 소곤거렸다
고향 가는 열차에서
나는 말소리에 귀기울였다
각각 무릎에 앉아 잠든 아기 둘은
두 여인 닮았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짐짓 차창 밖 보는 척하며
한마디쯤 알아들어 보려고 했다
(중략)
두 여인이 동남아 어느 나라 시골에서
우리나라 시골로 시집왔든 간에
내가 왜 공연히 호기심 가지는가
한잠 자고 난 아기 둘이 칭얼거리자
두 여인이 깨어나 등 토닥거리며 달래었다
한국말로,
울지 말거레이
집에 다 와 간데이
- <아시아계 한국인들>에서 '원어原語' 일부
시집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은 죄다 한국인이다. 누구 하나 한국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이곳 한국 땅에서 터 잡고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 이야기다. 말이 다른 것이야 생각이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 만큼 쓰는 말이 무엇이냐는 대개 진짜 고민거리가 아니다. 부부의 정, 부모자녀 간의 정, 온간 정들이 모여 이루는 한국인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나(누구는 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누구는 아내가 필요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어지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서로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속내를 어쩌지 못해서 지나친 다툼을 하기도 한다. 재밌고도 신기한 것은, 이렇게 살거나 저렇게 살거나 그 삶들이 모두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낯익은 이야기요 그래서 다 한국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이야기란 말이다.
필리핀인 아내는 삼겹살을 불판에 얹고
한국인 남편은 한 점씩 상추에 싸서
어린 아들딸에게 먹였다
(중략)
부부는 밑반찬만으로 밥 다 먹었다
남편이 아내한테 결혼 선물로 받았으나
이제 낡아버린 지갑을 꺼내 식대를 지불하는 새
아내가 어린 아들딸 손잡고 한데로 나갔다
부부를 반반씩 닮았으면서도 서로 달라 보이는
이란성 쌍둥이를 배고 낳았으면서도
필리핀인 아내는 임신 중이나 출산 후에도
친정 가서 필리핀 음식을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헛구역질 한 번 하지 않고 한국음식 잘 들었다
한국인 남편은 거스름돈을 지갑에 고이 넣었다
- '지갑' 일부
아무리 '낯선 여성' '낯선 엄마'들이 많아졌어도 사실 도시에서는 여전히 어쩌다 보는 우연한 일인 경우가 많다. 특히 대도시 서울에서는 '낯선 여성'을 보는 시선이 곱지도 따갑지도 않다. 도리어 무덤덤하게 무관심한 시선을 보낼 뿐이다. 어쨌거나 서로 얼굴 자주 보고 말 자주 주고받는 시골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선 익숙함과 낯설음을 구분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시아계 한국인' 이야기는 어느 한쪽 동네의 이야기일 뿐일까.
사실상 모든 시들이 시골 배경을 담고 있기에 <아시아계 한국인들>은 어찌 보면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넓히고 집중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그림 속 풍경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베트남에서 시집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와/ 필리핀에서 시집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계집아이가/ 들판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결코 바다 건너 다른 곳이 아닌 이곳 한국 땅에서 피어난 소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21세기 한국 사회는 지금 무지개 빛깔을 만들어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아시아계 한국인들> 하종오 시집. 삶이 보이는 창, 2007.
* 이 서평은 제 파란블로그에 싣고 리더스가이드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2009.02.26 15:4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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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한국인들 - 하종오 시집
하종오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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