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국민의 방패 아닌 공격무기 되고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비판의 자유 있는 게 민주주의"

등록 2009.03.06 17:36수정 2009.03.0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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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석 등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 5명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 박상규

박원석 등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 5명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 박상규

 

한인섭 서울대 교수가 증인석에 선 까닭

 

"봉산탈춤에도 정치 풍자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봉산탈춤을 정치 행위로만 봐야 하나? 우린 그걸 문화로 보지 않나. 자꾸 2008년 촛불집회를 정치집회로만 몰아가려하는데, 정치와 문화는 뚜렷이 나뉘는 게 아니다."

 

'골수' 촛불집회 참석자의 말이 아니다. 촛불집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의 말은 더욱 아니다.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한 법학자의 증언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으로 사법부의 권위가 추락하고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던 지난 5일 오후. 박원석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 등 5명에 대한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방법원 522호 법정에서는 신선한 풍경이 펼쳐졌다.

 

피의자 쪽 증인으로 나선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형사법) 교수가 법정 증인석에서 법과 민주주의에 대해 강의 아닌 강의를 한 것이다. 특히 한 교수는 제자뻘 되는 젊은 검사와 '쿨'한 설전까지 벌이며 "촛불집회가 정치적인 게 아니라 촛불집회를 조사하는 검찰이 정치적"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한 교수와 검찰이 설전을 벌일 때 꽉 찬 재판정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자주 터져 나왔다. 가장 많은 웃음이 터진, '오마이TV'를 통해 생중계 못한 게 아쉬웠던 한 장면은 이러했다.

 

"집회 장소와 일시 어떻게 알았냐니... 온 국민이 다 아는데"

 

검사 "촛불집회는 몇 번 정도 참석했나?"

한 교수 "5월에서 6월까지 8~10회 정도 참석했다."

검사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는 접속해봤나?"

한 교수 "접속해 보지 않았다."

검사 "그러면 집회 장소와 일시는 어떻게 알았나."

한 교수 "(웃음) 그건 뭐 온 국민이 다 아는 것인데…. 그냥 서울시청 근처로 가면 된다. 시청역에서 내려도 되고, 을지로 주변에서 내려도 된다. 포털사이트 뉴스에서도 집회 장소 확인했다."

검사 "촛불집회에서 어떤 정치구호가 나왔나."

한 교수 "'MB OUT!'이 일상적인 구호였다. 그런데 이걸 사람들이 '엠비 아우~~웃!(여우 목소리를 흉내 내며)'이라고 외쳤는데, 이걸 정치 구호로 봐야 할까? 그리고 학생들은 0교시 반대를 외쳤고, 스님들은 어차피 쇠고기 안 먹으니까 대운하 반대 등을 외쳤다. 그리고 수녀님들은 다른 걸 주장했다. 이걸 다 정치 구호로 봐야 하나."

 

검사는 계속 촛불집회의 정치성을 따져 물었다. 이에 한 교수는 "촛불집회 때 '대운하 반대' '0교시 반대' '명박이는 내려오라'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언제든 애니콜!' 등 획일성을 넘어서는 다양한 구호가 수없이 나왔는데, 이런 걸 어떤 근거로 정치구호로 단정할 수 있겠느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법정에서는 촛불집회 정치성을 묻는 질의가 계속 이어졌다. 한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비판의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게 민주주의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에게 '정치적이다'라는 타이틀을 붙여 불법 운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상대를 공격할 때 '정치적'이라는 말은 제한적으로 쓰여야 한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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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석 등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 5명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 박상규

박원석 등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 5명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 박상규

한 교수는 "법의 현실적 구현을 탐구하기 위해"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또 연구했다. "집회문화의 변화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강의와 연구 기초자료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촛불집회 현장을 찾았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한 교수는 법정에서 "작년 촛불집회는 학생, 수녀, 스님, 대학생, 아이 엄마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대표자 없이 자가 발전한 형태였다"고 강조했다.

 

형법을 전공했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학자로서 한 교수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 5명이) 왜 법정에 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과연 대책회의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석자들은 제각각 움직였다"고 말했다.

 

이어 다시 한 교수는 형법학자로서 정부에게 이런 쓴 소리를 던졌다.

 

"1987년 개헌 이후 국민들의 형법상 기본권은 계속 확장 추세였다. 하지만 작년부터 국민들 표현의 자유가 위기국면으로 치달았다. 형법은 시민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형법의 위치가 방패에서 무기로 옮겨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형법이 국민 방패가 아닌 공격의 무기가 되고 있다"

 

또 한 교수는 박원석 상황실장 등에게 적용된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꼬집었다.

 

그는 "촛불 시민들이 도로를 손괴했나, 아니면 도구를 이용해 교통을 불통시켰나. 오히려 컨테이너로 도로를 막은 건 경찰이었고, 그들이 반성해야 한다"며 "표현의 자유가 있는 집회 참가자들이 대열지어 걸어가는 게 어떻게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에 해당하나, 우리나라가 '차량 지상주의국가'인가"라고 따졌다.

 

또 한 교수는 "촛불집회가 폭력적이었느냐"는 변호인 측 질문에 "개인적으로 촛불이라는 매개체에 주목하는데, 한 손에 촛불을 쥐면 쇠파이프도 들 수 없고 빨리 뛸 수도 없다"며 "일부에서는 폭력시위라고 하는데, 폭력에 대한 불안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장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촛불이 문화제였나, 정치 집회였나'라는 논란에 대해 "봉산탈춤에도 정치 풍자가 녹아 있지만 우린 그걸 정치 행위가 아닌 문화로 보지 않느냐"며 "정치와 문화를 뚜렷하게 양분해서 구분하는 건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재판이 끝난 뒤 많은 방청객들은 한 교수에게 "명 강의를 들은 것 같다" "우리 학교에 와서 강의 한번 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교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법정을 떠나는 길. 한 교수에게 "오늘 법정에서 만난 판사와 검사들이 혹시 과거 제자들 아니었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잠시 침묵) 서로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 충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돌아보면, 현재의 '사법 파동'은 각자의 역할을 뛰어넘는 '개입'이 화근이 됐다. 그래서 한 교수의 마지막 '멘트'는 신영철 대법관을 향한 충고이기도 하다.

#한인섭 #국민대책회의 #촛불 재판 #신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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