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이었다.
"아니, 네가 웬일이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옥상에서요."
"그렇구나. 웬일인지 자꾸 인기척이 느껴지길래,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랬었지."
효진이 리어카에 가득 담겨 있는 책 꾸러미를 살펴보고는 말했다.
"선생님. 팔 책은 아주 중요한 것들은 아니네요."
"그렇지? 팔아도 될 만한 것들이지?"
"세계문학전집도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들이겠죠? 당시에 유명하던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이기는 해도, 일본 것을 번역해서 번역에 번역이 되었을 테니까요."
서양의 명작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에서 펴냈던 책들을 다시 이 땅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펴냈다는 뜻이었다. 중역(重譯)이 되는 셈이니, 아무래도 원서의 문체가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그런데 효진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 책들이 나올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잖아요."
기억이 왜 이리도 흐려지는가.
그랬었다. 선호가 민주초등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좋은 책 고르는 법'을 강의하면서 그런 상식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내 집을 다 찾아왔니?"
"선생님께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래? 점심은 먹었니? 이제 정오니까 아직 안 먹었겠구나."
"아직 생각은 없지만 선생님이 배고프실 것 같아요."
"나도 괜찮다만, 간단히 할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선 이 리어카나 빨리 채워서 고물상 가져다주고 오는 게 좋겠다."
"제가 신문 꾸러미 나르는 것 도와드릴게요."
선호는 미소를 지으며 계단으로 올라갔고 효진이가 뒤따라 올라갔다. 몇 번 오르내린 뒤, 선호는 가득 채운 손수레를 배 쪽으로 당기듯이 하며 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효진이는 리어카 앞쪽을 붙든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언덕길을 함께 내려갔다.
"아니, 숨겨둔 딸이 있었수?"
선호가 아는 동네 아줌마가 장을 보고 올라오다 물었다.
"하하. 결혼도 안 한 사람한테 숨겨둔 딸이 있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제잡니다, 제자."
여대생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 처음인지라 평상(平床)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던 할머니들도 수군수군거렸다.
얼마 후, '구월마을 재활용자원'에 도착한 선호는 리어카를 자동차 저울기로 밀어올렸다. 자동으로 무게가 측정되는 저울 장치가 되어 있었다.
"220!"
고물상에서 일하는 남자가 사무실 2층에 설치된 자동 숫자판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신문이 많이 쌓여진 곳으로 리어카를 끌고 가 한 꾸러미 한 꾸러미 가위로 끈을 풀어내어 던져 쌓기 시작했다. 신문이나 책들은 던지는 대로 시체처럼 나가떨어졌다.
'220'이란 220킬로그램이라는 뜻이었다. 리어카 무게 70킬로그램을 빼내면 150킬로그램인 셈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사람 좋은 인상의 고물상 여사장이 1만원권 지폐와 1000원권 지폐를 세어 건네주며 말했다. 선호가 받은 돈은 1만 5000원이었다.
"매번 고맙습니다."
선호가 웃으며 말하자 고물상 여사장이 방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뭘요, 오히려 우리가 고맙죠."
"그래도 이렇게 한푼이라도 아쉬울 때 바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이 어디 많습니까."
덕담을 주고받고 난 선호는 시원한 바람을 쏘인 듯 잔뜩 흘렸던 땀이 식는 기분이었다. 선호는 옆에 서 있는 효진에게 물었다.
"커피 마실래?"
"예."
고물상 1층 사무실 겸 고물장수들의 휴게실인 좁은 공간에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전을 넣지 않아도 커피를 뽑아 마실 수 있게 해놓았다. 선호는 먼저 효진에게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뽑아 건네주고는 자신도 뽑아들었다.
"그래, 효진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선생님 집을 찾아왔을까?"
"그러니까… 모래내시장에다 새책방을 겸한 헌책방을 차렸으면 해서요."
"그래? IMF 이후에 책 안 사보는 사람이 많아져서 서점 운영하기가 힘들 텐데…."
"책을 좋아하는 부잣집 친구가 있는데, 돈을 빌려줄 테니까 서점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자기가 자주 놀러갈 수 있는 책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남자친구야?"
"예."
"그럼 그 친구가 운영하고 판매하는 일만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을까?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말야."
"그 친구는 공부해야 할 게 많아서 시간이 남지 않나 봐요. 집안에서 기대가 아주 큰 모양이에요. 돈을 빌려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적자가 나면 돈 갚을 생각 안 해도 된다고 그랬어요."
"좋은 친구구나. 그래, 자리는 알아봤어?"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언제쯤 차릴 생각이니?"
"가을에요."
"그럼 대학 공부는 어떡하고?"
"학교는 쉬어야죠, 뭐. 2학기 동안만."
[계속]
덧붙이는 글 | 2004년 말에 초고를 써놓고 PC 안에 묻어두었던 소설입니다만,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의 세상 이야기와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고려하여 많은 부분 보충하고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선호의 눈을 통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소중한 우리 삶의 여러 실화를 모델로 한 서사성 있는 창작입니다.
2009.03.11 17:5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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