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7, 8명의 남녀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누가 제안했는지 그들은 온몸에 흙을 발랐다. 구헌도 그들을 따라 온몸에 두텁게 흙을 발랐다. 그는 동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미군의 눈을 피해 소리 내지 않고 산으로 기어올랐다.
한편 형이 떠났는지도 모르는 동생 구학은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구학은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액체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었다. 얼마 후 다시 깨어난 구학은 실성한 듯한 아줌마가 다리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얘야, 넌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니?"
"제 얼굴이 이상해 보이나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갈증이 심해진 구학은 몸을 일으켰지만 주위가 빙빙 돌아 다시 눕고 말았다. 구학은 몸을 땅에 대고 물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그는 이상하게도 물이 자꾸만 옆으로 새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마시려 해도 물은 목으로 들어가 주지 않았다.
구학은 다시 자기를 보고 있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측은한 듯 구학을 물끄러미 보다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구학은 손으로 물을 움켜 입으로 넣었지만 아까처럼 물은 목으로 들어가 주지 않고 턱 아래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구학은 그것이 얼굴이 반쯤이나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병원에 가서야 알게 된다.
"내 동생 구학아!"
구헌은 죄책감으로 며칠을 시달렸다. 몸도 성치 않은 동생을 버려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다리 아래 시쳇더미 속에서 숨을 파닥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노근리로 다시 간다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지만 그는 가보지 않고는 자신이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30일 새벽, 눈을 뜬 구헌은 동생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인민군이 노근리 일대를 점령한 직후였다.
이윽고 쌍굴다리에 한 10대 소년이 나타난다. 인민군 한 명이 시체들을 지키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인민군 병사의 뒤로 보이는 작은 굴속에는 부어오르다가 굳어버린 시체들이 뒤엉켜 있었다.
"나는 동생을 찾으러 왔습니다."
인민군은 말없이 턱으로 굴속을 가리켰다. 들어가 보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비 내리는 날의 다리 안은 어두컴컴했다. 희부연 시체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잘 보이지 않으니 손전등이라도 좀 비춰 주시겠어요?"
"미쳤소? 불빛이 보이면 미군의 화력이 이곳으로 집중될 텐데. 그러면 당신이나 나나 다 함께 죽어요."
할 수 없이 구헌은 혼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먹으며 시체 하나를 넘어섰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쉰 후 동생을 불렀다.
"구학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내 동생 구하가아!"
어느덧 그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은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꿈인지 환청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답을 하려 해도 피가 말라붙은 목구멍에서는 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게다가 코와 얼굴 일부가 떨어져나간 동생 구학은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있었다.
구헌은 시체에 발이 걸려 자꾸만 비틀거렸다.
"구학아, 내 동생 구하가아!"
동생은 말소리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구학은 사람의 발이 옆구리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분명히 형의 발일 것이었다. 그때 동생의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형이 발 아래를 보는 순간 동생은 형의 신발 위에 손을 탁 떨어뜨렸다.
인민의 군대라면서요?
구헌은 영동읍에 인민군 병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형은 동생을 업고 10리 이상의 길을 걸었다. 5층짜리 구세군 병원은 영동에서 무너지지 않은 다섯 채 남짓의 건물 중 하나였다. 도로에는 인민군과 미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 병원 마당의 맨땅 위에 누워 있는 인민군 부상자들을 본 구학은 낙심했다. 군인들도 치료를 못 받고 있는 터에 동생에게까지 치료의 혜택이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다짜고짜 의사 가운을 입은 군의관 앞에다 동생을 내려놓았다.
"약 좀 주세요."
예상대로 군의관은,
"병사들에게 줄 약도 없어."
하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구헌은 겁나는 게 없었다. 구헌은 울먹이는 소리로 군의관에게 말했다.
"인민의 군대라면서 인민이 다쳐 죽어 가는데 약도 안 주나요? 내 동생을 이렇게 만든 것은 인민의 적이라는 미군이라구요. "
군의관은 골똘히 구헌을 보더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얼마 후 나온 군의관은 봉지약을 내밀며,
"부추와 함께 찍어 발라라."
말하더니 휙 돌아서 가 버렸다.
그날부터 여름이 다 가기까지 구헌은 동생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 살려낸다. 물론 동생의 얼굴은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구헌은 동생이 살아나 준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이승만은 거제도 별장에, 국회의원 48명은 인민공화국에 충성 맹세
노근리 참화가 발생한 시점인 7월 27일, 일본에서 전쟁을 원격 지휘하고 있던 맥아더는 도쿄에서 대구로 날아왔다. 그는 대구 포기를 검토하고 있던 8군사령관 워커를 만나 어떻게든 버텨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언론을 통해 일선 지휘관들의 효용성 있는 전투 지휘를 치하했다. 그리고 그는 공군이 성심을 다해 지원해 주었다고 추켜세웠다.
매일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대구, 부산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진창으로 미끄러운 길도, 앞을 가리는 흙먼지 길도 마다할 수 없었다. 집을 버린 그들에게는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다. 남한 땅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행렬이 대구로, 부산으로 정처 없고 막막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이럴 즈음 이승만은 전쟁 개시 일주일 후부터 아예 한반도 남쪽 끝 한 섬인 거제도의 별장에 피신하여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전선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울 포기도 통보받지 못한 채 남았던 국회의원 중 48명이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 사실도 남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 이승만 노선을 취했던 남한의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이승만에게 당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가 안보를 통째로 미국에 떠넘겨 버리는 벼랑 끝 외교 전략을 선택했다. 그는 미군 위관급 장교 짐 하우스먼(<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하우스먼>의 저자)의 천거를 받아 정일권을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다. 그는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자진 이양해 놓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을 훈수하며 전세를 뒤엎을 묘안을 궁리하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