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관하여 내 이야기를 하자면, 좋지 않은 기억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훨씬 더 많다. 결혼 때부터 지방 소도시에서 서민 아파트를 전전했던 내게 아파트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투기의 대상으로서나 계층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으로서가 아니다. 우리 집 아래층 '어르신'과 수년 동안 소음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급기야 경찰서까지 가야했던 아팠던 기억과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게 내게 남아있다.
그 때 이후 난 10년이 넘도록 아파트에 내 잠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내가 울고 싶을 때 큰 소리로 울 수 있으며, 따스하게 몸을 데울 수 있으며, 내 아이가 맘대로 뛰어놀 수 있는 자유를 아파트는 나에게서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지난 해, 미우면서도 궁금한 '아파트'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서 박철수가 쓴 <아파트의 문화사>를 나는 읽어보았다. 아파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도 내게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었다. 이 책에서 박철수는 "물욕(物慾)의 대상으로 자리한 아파트에 대해 비웃는 데서 벗어나 따스한 눈길을 보내자"고 제안하였고, 아파트를 '더불어 사는 문화적 결정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고도 밝혔다.
그의 제안이 내게 설득력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아파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아파트에 미치다>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아파트에 얽힌 나의 아픈 사연들과 경험들, 내가 아파트에 대해서 기대했던 일들을 가지런히 챙겨가면서 책을 읽었다.
아파트에 살고 있거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에 대하여, 전상인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아파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파트는 우리 시대 한국사회의 영욕은 물론,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30 쪽)." 그도그럴것이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의 구입희망 주택유형을 보면 아파트가 68.9%로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단독주택은 21.8%에 머물고 있다(47쪽)"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국민 다수가 선망한다 해서일까. 아파트가 주거 공간으로서 기능에서 나아가 '부의 원천'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국민들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전상인은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이 시장모델에 근간을 두었기 때문에 "주택이 사고 파는 것이라는 인식, 곧 주택의 높은 상품성을 전제로 한 것(57 쪽)"이라는 얘기다. 이를 두고, 그는 "파행적 시장모델"이라는 평가한다. 또한 정부 주택정책의 수혜자가 중상층계급이 될 개연성이 높다고도 덧붙인다(57쪽). 이러한 문제는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라는 정태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축재의 원천이나 수단이라는 동태적 의미까지 포함한다(61쪽)", "이른바 '부동산 불패신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아파트가 가장 보편적인 재태크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62쪽)"는 비판도 전상인은 빼놓지 않는다.
글쓴이의 아파트 이야기는 '재 태크 수단'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중상층계급에게 있어서 아파트가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의 대상이라고 설명한다(69쪽).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주거문화를 질적으로 높여가는 게 아니라 주거면적으로 늘여간다고 그는 비판한다(71쪽).
골목이 없는 아파트 생활이 공동체 정신을 약하게 하고 공동체 문화를 잃어버리게 할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에 대해서, 글쓴이는 아파트 생활이 비공동체적이고 반공동체적인 것만은 정확하고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101 쪽). 아파트가 "일반주택가에 비해 공동체사회운동을 위한 조건을 유리하게 갖춘 경우가 많다(111쪽)"는 것이다. 요새화된 주거공동체를 비판하는 데 대해서도, 글쓴이는, 그것이 주거문화의 보편적인 경향,이며(107쪽),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아줌마의 힘에 대해서도 집단이기주의로 단죄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본다(112쪽). 요사이 일반화된 것으로서, 아파트주민자치회라든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작은 도서관을 주민들이 스스로 설치하고 운영하는 사례에서 우리는 아파트의 공동체로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가 공동체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쓴이는 우리 시대 '아파트 거주' 중산층의 삶에 대해 중요한 평가를 내어 놓는다. 그의 이러한 평가를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나는 읽었다.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중산층 신화나 부르주아 문화주의에 안주했던 사람들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다. 1970-1980년대 노동억압적 체제 속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에 직면했던 것은 사실이다. 반민주적 권위주의 통치가 많은 이의 자유와 행복을 앗아간 것 또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사회체제에 편승한 그들을 그처럼 고단하고 소란한 현실세계의 도피자나 은둔자로만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135쪽)."
"한국의 아파트 중산층계급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견인차이자 파수꾼의 역할도 함께 담당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136쪽)."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나는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파트가 우리 시대 부의 축적 대상으로서 그 가치가 높아만 가는 게 현실이라면,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앞으로도 계속된다 할 경우에도 중산층의 개인적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이나 개인적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 역시 같은 시대를 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그것 또한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내가 겪은 서민 아파트 거주자들의 인간으로서 삶과 개인적 삶은 또 어떻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까. 층간 소음과 '문화의 향유'와는 거리가 있는 이들의 주거문화 또한 애정 어린 시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는 물론 아파트 거주자들이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파트의 공간배치와 관련, 최근 아파트 설계 경향 가운데 "집 전체를 하나의 덩어리 또는 매스로 간주하는 경향(166쪽)"이라고 글쓴이가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정보라 할 것이다. "'열린평면'을 향한 아파트의 새로운 진화는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 만능 시대 그 이후의 역사를 미리 대비하는 아파트의 또 다른 변신 예고편일지도 모른다(168쪽)"고 그는 본다. 프라이버시 만능 시대 이후를 대비한다는 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데, 이는 나만의 생각일까.
이 책을 쓴 전상인은 머리말에서 우리 학계에 대해 "스토리가 부족하고 디테일이 취약하며 모국어의 미학 또한 아쉽게 남아 있다(7쪽)"며 쓴 소리를 하였다. 처음부터 작심하고 학자들의 글쓰기 방식을 벗어나겠다는 얘기다.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말은, 비단 우리 학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말과 글, 그림과 영상 등 의사소통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도 적절한 지적이다. 디테일이 약하고 모국어의 미학을 살리지 못한다는 얘기도 뼈아프게 들어야 할 것 같다. 다만 모국어의 미학에 대해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학문적 논쟁이 격화된다 하여도 모국어의 미학은 충분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념 논쟁이라 하여 모국어가 거칠게 사용된다면, 이는 논쟁하는 이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가 '계층'이라는 말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내게 긴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글쓴이가 "한국사회의 이념 논쟁에 관련하여 나름대로 전방에 나서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느 날 덧없이 허무하게 여겨졌다. 나날이 까칠해지는 내 자신이 싫었고, 하루하루 거칠어지는 나의 글이 미워졌기 때문이다(9쪽)"라고 고백하는 데에 이르면, 그와 동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좌파 진보 평등 이데올로기가 쉽게 파급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한다. (중략) 좌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막아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적 확대재생산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은 확실히 달라질 필요가 있다(182 쪽)"는 데까지 가면, 그가 아직도 예의 전투적인 이데올로그로서 전의(戰意)를 버리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그에게만 돌릴 수 있는 책임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가 "생활밀착형 학문(10쪽)"과 "학문적 품격과 문화적 감성을 겸비한, 말하자면 르네상스맨이라 부를만한 인물"을 기대하고 있는 것에서(10쪽), 그리고 이 책의 꼼꼼하고 알찬 내용에서 그의 학문적 자세와 성실성을 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을 포용할 수 있는 주제"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 또한 높이 사주어야 할 것이다.
전상인, 아파트에 미치다, 서울:이숲, 2009
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이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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