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못 할 정도면 아예 술을 입에 대지 말아라"

36년 전의 은사님을 만나서 양주 1병을 기분 좋게 비웠습니다

등록 2009.03.29 17:15수정 2009.03.2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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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의 은사님을 찾다

 

며칠전(22일) 시댁 일로 청주에 가게 되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그날 갔다 그날로 부리나케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그렇질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첫 번째 청주에 살고 계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뵙고 싶었다. 날 많이 귀여워해주시고 관심을 많이 쏟아주셨다. 몇 년 전 뵐려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같은 이름이 별로 없는 데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서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전화를 드렸더니 명절 쇠러 선생님의 큰 집에 가셨다기에 얼굴을 뵙지 못한 채 몇 년이 지났다. 좀 더 늦기 전에 찾아뵙고 싶었다.

 

마침 잠시 외출했다가 바로 집에 들어오신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는 선생님을 뵈러 딸아이하고 나섰다.

 

'선물을 무얼 할까?' 마트에서 망설였다. '양주? 와인? 과일?' 다 상태가 맘에 안들거나 마땅치 않아서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가지고 찾아뵈었다. 연세는 많이 드셨지만 36년 전의 깐깐하고 패기있으셨던 그 모습만은 간직하고 계셨다.

 

반갑게 맞아 주셨다. 딸아이 하고, 한사코 마다하시는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다.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36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같은 반 아이들하며 선생님들 얘기로 끝이 없었다. 시골이었지만 한 학년에 3학급은 됐었고, 특히 우리 학년은 아이들이 많아서 4학급이나 되었다.

 

누구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고, 누구는 방송국에 있다고 하고, 누구는 돈을 많이 벌어 아이들 둘을 캐나다로 유학 보냈다며 아이들의 많은 정보를 알려 주셨다. 36년 동안 거의 걸음하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있었건만 선생님 얘기를 들으며 얼굴 하나씩을 떠올리려 애썼다. 물론 청주 내려가기 전에 사전 공부도 약간 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고 아이들 얼굴을 떠올려 봤던 것이다. 

 

선생님 말씀으론 "너 그 애들 지금 길거리에서 보면 하나도 못 알아볼 거다"라고 하셨다. 다행히 올해 우리 기수 아이들이 체육대회를 주최하는 해란다. 난 꼭 동창들한테 내 얘기를 전해달라고 선생님께 간청을 드렸다. 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6학년 겨울방학 때 가족 전체가 성남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졸업식은 성남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했다. 10여일 남짓 다니고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식날 밤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기억이 있다.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상장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친구도 없는 쓸쓸한 졸업식이 어린 마음에도 어지간히 서러웠던 모양이다.

 

36년 전 열세 살짜리 수줍은 꼬맹이, 이제 은사님과 술 나누며 삶을 얘기하다

 

그 뒤로 아이들과 연락도 안되고 30~40여 년의 공백이 흘렀다. 그 빈 공백을 이번을 기회로 해서 채우고 싶었다.

 

"다음에 찾아뵐 땐 술 사가지고 찾아뵐께요."

"너 술 마실 줄 아니?"

"조금요."

 

손수 양주 한 병을 가지고 오셨다. 딸아이까지 셋이서 마셨다. 반 병쯤 남자, "그만할래요" 했더니 따놓은 건 다 마시고 가라신다.

 

"선생님 대낮에 과한 것 같은데요. 낼 출근해서 수업해야 하는데요."

"수업 못 할 정도면 아예 다음부턴 술을 입에 대지 말아라."

 

다시 얘기를 이으며 결국 선생님은 양주는 싫다시며 소주를 드시고 결국 딸아이와 둘이서 남은 양주를 다 마셨다.

 

기분이 좋았다.

 

"엄마 닮았으면 너희들도 공부 잘 할거야. 그렇지?"

 

딸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의 어릴 적 잘 나가던 얘기를 선생님이 다 해주셨다. 딸 앞에서 어깨가 한껏 으쓱해졌다. 짜식들, 내가 얘기하면 두 아이는 "엄마만 잘났대" 하며 입을 비쭉거리기가 일쑤였다.

 

어릴 때 자유교양대회 나가서 상받은 얘기며 자유교양대회 독후감쓰기에서 충청북도에서 동메달을 받은 얘기며, 시험 보면 늘 우등상 받은 얘기며, 졸업식 때 학교 빛낸 공로로 공로상에 오른 거며(전학 바람에 공로상은 타지 못했지만), 선생님들께 사랑받은 얘기며, 필자에 대한 선생님의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자유교양경시대회로 일약 학교의 주목대상이 되었던 필자

 

자유교양대회 나갔을 때 교감선생님이 인솔해 주셨다. 5학년 때인가 촌에 살던 내가 청주시내에 가서 처음으로 짜장면 먹은 기억은 지금도 머릿속 깊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잘 생기시고 인상도 좋으셨던 김형식 교감선생님도 살아계시다면 뵙고 싶다. 

 

그러고 보니 좋은 추억이 많이 남아 있는 게, 내 어릴 적 삶이 제법 괜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유교양대회가 70년대 초반에 있었다.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책을 정해서 읽고 대회에 나가서 문제를 풀고 독후감을 쓰는 것 등이었다. 대회 나가서 상을 받고 독후감대회에서도 충청북도에서 3등을 해 동메달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학교에선 주목의 대상이었다.

 

처음엔 대우해주는 것 같고, 뽑혀서 하는 거니까 좋은 것 같았는데 나중엔 싫어졌다. 아이들 놀때 놀지 못하고,제일 안타까왔던 건 친구들은 모두 나가서 운동회 연습하는데 난 교실에 남아서 책을 읽어야 하는 거였다.

 

그럴 때면 창가에 앉아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땡볕에서 운동회연습하느라 고생하는 친구들은 편하게 교실에 앉아 책이나 읽는 나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내입장에선 어찌 보면 연습보다 자유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선정된 책으로는 '사랑의 학교'나 '엄마찾아 삼만리' '이솝 이야기' 등이 있었고, 국내서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이 잘 안난다. 고전을 많이 읽히자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난 강제성 때문에 책읽기가 더 멀어졌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고 한편으론 혹 시골에서 책구경하기 힘든데 이렇게 책을 대하게 되어 오히려 많은 걸 알게 되었다고 봐야 하나 싶기도 했다.

 

'엄마찾아 삼만리'에선 이탈이아 어린 소년 마르코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 엄마를 찾아 온각 역경을 견뎌가며 끝내 엄마를 찾아내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도 있다.

 

남은 삶도 부끄럽지 않은 제자로 살 것임...

 

어렸을 땐 철없어서 몰랐던 것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듣는 선생님 얘기는,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은 변했을 세월의 강을 한번에 건너게 해주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내시며 현실과 타협하시지 않고, 승진의 길을 접고 아이들을 좋아하며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수업을 퇴임하실 때까지 하시고, 기간제 수업까지 하셨다는 얘길 듣고 한편으로 내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이들이 힘들어, 수업이 힘들어 가끔씩 관두고 싶어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선생님 앞으로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새기며 교직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가슴에 새기며 아이들을 만날께요.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의 제자가 되도록 더 노력할께요.'

덧붙이는 글 | 물론 월요일 수업은 꿋꿋하게 해냈습니다. 선생님의 걱정이 담기신 안부전화를 아침에 받고 다시 민망해졌습니다. 내리사랑은 부모자식간만이 아닌 사제지간에도 같이 적용되나 봅니다. 다음부턴 먼저 안부전화를 드려보리라 다짐해봅니다.

2009.03.29 17:15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물론 월요일 수업은 꿋꿋하게 해냈습니다. 선생님의 걱정이 담기신 안부전화를 아침에 받고 다시 민망해졌습니다. 내리사랑은 부모자식간만이 아닌 사제지간에도 같이 적용되나 봅니다. 다음부턴 먼저 안부전화를 드려보리라 다짐해봅니다.
#은사 #초등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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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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