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예리코 작전>(서해문집)은 1533년 창설된 과학자와 탐험가의 집단이 그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326년에 기록된 단서를 둘러싸고 지적 모험을 펼치는 3부작 어드벤처 소설이다
서해문집
마술적 리얼리즘과의 충격적인 첫 만남소설가 지망생으로서 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도 한다)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이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어처구니가 없어졌다면, 오히려 판타지나 어드밴처처럼 완전히 허구인 작품 속에서 진실을 발견할 여지가 많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알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는데, 선배가 대학 새내기인 나에게 가장 먼저 읽을 책으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남미의 신화와 가족사, 그리고 역사가 어우러져 얼큰한 찌개를 한 사발 먹은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이제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는 하나의 문학 기법으로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문학적 서사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미하일 불가코프, 에른스트 윙거 그리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유명해졌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마르께스와는 다른 맛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작품에서 1000일이 끝나고 나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재구성된다든가, 어떤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는데 그에 관한 주석이 모두 허위인 경우가 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시간을 물어본다면 3시 정각(사실)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2시 22분(거짓)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더 사실적일 것이다.
리얼리즘은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단지 사실을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르포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술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보다 더 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사실은 마술적 리얼리즘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며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표현이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레드 예리코 작전>(서해문집)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들이 노리는 물질인 '태양의 딸'과 그것을 얻기 위한 열쇠인 '자이롤라베'를 쟁탈하는 3부작 어드벤처 소설이다. 주인공 더그와 레베카는 실종된 부모님을 찾기 위해 상하이로 가지만 그것이 거대한 모험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나는 정교한 장면 전환 삽화, 사진, 방주(본문 옆에 넣는 본문에 대한 부연 설명), 부록이 어우러진 모험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언뜻 분명해 보였지만, 본문에 이런 종류의 자료를 삽입하려고 시도한 작가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다." - 조슈아 몰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이제까지 텍스트나 간단한 이미지만으로 구성했던 소설의 형식을 과학적인 장치와 도표, 신문기사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서 표현한 것은 21세기에 어울리는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이다. 텍스트가 하던 역할을 다양한 기호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단지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는 점 하나만 가지고서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레드 예리코 작전>의 3대 미덕<해리포터> 시리즈, <다빈치 코드> 등 상상력과 위트가 풍부한 소설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국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본주의의 실체를 알려면 19세기 영국 소설을 읽으라고 했던 우석훈씨의 조언이 떠오른다. 소설에 있어서는 영국은 언제나 시대를 주도한다는 생각이 든다. <레드 예리코 작전> 역시 영국인 작가의 소설이다. 현지에서는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의 후계자라고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레드 예리코>는 우선 성실하다.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텍스트의 흐름에 맞게 신문기사와 방의 구조도, 장치의 사용방법 등을 면밀히 기록해 놓았다. 특히 선박에 대한 정보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룬다티 로이는 그 후로 단 한권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실험, 대형댐 건설 프로젝트,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정치칼럼을 쓰면서 댐에 관한 기술서, 토목공학에 관한 실무적인 책들을 수없이 공부하며 정치칼럼가로서 다시 한번 태어난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이나 물리 등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거나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가 그런 지식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그런 지식을 흡수한다는 것은 분명 뛰어난 자질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참고문헌이 소용된 소설책은 처음 본다. (책의 말미에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참고문헌의 목록이 가득 채워져 있다)
레드 예리코의 구성은 더그와 레베카라는 똑똑하고 까칠하며 고집스러운 남매가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예기치 못한 모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급격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지만, 두 아이의 일기장과 스케치를 통해서 장면들을 환기해 준다. 소설의 내래이션인 셈이다. 소설이 흘러가면서 캐릭터들은 성장을 거듭한다. 성장을 거듭할수록 적들도 더 강해진다. 전형적인 게임의 원리이지만, 생각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생동감 있다. 레베카의 캐릭터는 더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캐릭터 부분도 흥미를 줄 것이다.
캐릭터들의 생생한 대화와 행동은 이 작품의 맛을 더해준다. 특히 악당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는 경지에 이룬 것 같다. 그 중에서 악당 성팟에 대한 묘사는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못됐다'. 성팟은 자신의 요새 주위를 호위하는 무장 경비병을 300명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얼굴에 직접 V자 표시를 새겨 넣었다. 그 표시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같은 것인데 이 표시를 한 이유는 누군가 부하들을 자청하며 요새로 숨어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만약 성팟의 부하로 변신해 침입하고자 한다면 우선 V자 표시를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성팟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부하를 가장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레드 예리코>에 묘사된 악당은 용의주도하면서도 끔찍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기술과 명예를 가진 자들의 레드 예리코 작전 - 태양의 딸을 찾아서
조슈아 몰 지음, 강미경 옮김,
서해문집, 200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공유하기
권위주의 사회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생각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