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용지' 못 구해 일제고사 못 보겠네

[28년째 초등교사가 말하는 초등교육이야기 13] 3월 31일, 일제고사 진단평가 문제②

등록 2009.03.28 13:56수정 2009.03.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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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학력신장을 강조할수록 아이들은 점점 더 문제 잘 푸는 기술자, 문제푸는 기계가 되어갑니다.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학력신장을 강조할수록 아이들은 점점 더 문제 잘 푸는 기술자, 문제푸는 기계가 되어갑니다. ⓒ 이부영


교과부는 국가수준 평가가 아니고 각 시도별로 하는 평가라 하는데, 전국 시도교육청은 모두 교과부 눈치를 보면서 전국이 교과부에서 제공하는 똑같은 문제로 31일에 일제히 일제고사로 진단평가를 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학교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공문에는 '학생들이 진지하게 시험에 임하게 하라'는데도 교사인 제가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교과부 장관님, 진단평가는 일제고사가 맞습니다

교과부 장관은 진단평가가 자꾸 일제고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번에 진행하는 진단평가는 누가 뭐래도 전국에 있는 모든 학교 학생들이 같은 평가지로 같은 시간에 일제히 평가를 치르는 '일제고사'가 맞습니다. "언론에서 일제고사라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는 교과부 장관님의 말씀은 장관님도 일제고사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벌써 잘 알고 계시다는 얘깁니다.

교육청이 각 학교에 공문으로 내보낸 '2009학년도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 관리 강화 및 장학 지도 계획'을 보면, 이번 일제고사를 대비해서 '대학수학능력시험 및 정기고사 시행에 준한 시험 관리 계획을 수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영 그렇지가 않습니다.

8절 용지를 갑자기 어디서 구하지?

그 중 한 가지가 평가지 인쇄 관련한 것입니다. 지난 10월에 본 두 가지 일제고사, 초3 기초학력진단평가와 초6학업성취도평가에서는 평가지를 각 시도교육청에서 한꺼번에 인쇄해서 각 학교로 나누어 주었습니다(경기도 교육청이 그만 잘못 인쇄된 평가지를 나누어 줘서 문제가 된 적이 있지요. 지금까지 이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이번 일제고사에서는 표집학급만 시도 교육청에서 인쇄해 주고, 비표집학급은 각 학교에서 인쇄를 하라고 합니다.

a 3월 31일 일제고사 관련 공문 중 일부 인쇄는 각 학교에서 하는데, 반드시 8절 용지에 하라고 합니다(빨간색 표시).

3월 31일 일제고사 관련 공문 중 일부 인쇄는 각 학교에서 하는데, 반드시 8절 용지에 하라고 합니다(빨간색 표시). ⓒ 이부영


그런데 평가일을 나흘 앞둔 27일자로 교육청에서 학교로 내려온 관련 공문을 보니, 시험지 인쇄를 반드시 '8절 용지(가로 27.5cm, 세로 39.5cn 크기)'에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보통 많이 쓰는 'B4 용지 및 A4 용지는 불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28, 29일은 휴일이라 실제로 평가지를 인쇄할 시간은 30일뿐인데, 교육청은 27일에야 부랴부랴 담당자 협의회를 연 뒤에 CD로 나누어주고 평가 문항을 인쇄해서 학년별 교과별로 따로따로 봉투를 마련해 넣어 두라고 하는데, 이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인쇄야 휴일에 초과근무를 하면서 한다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구하기 힘든 8절 용지에 문제를 인쇄하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8절 용지와 8절 봉투는 주로 국가고시를 볼 때 쓰는 규격으로, 학교에서나 주변에서 흔히 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평가할 때는 주로 B4용지에 인쇄를 해서 봅니다. 느닷없이 8절 용지와 대봉투를 충분히 확보하라고 해서, 인터넷에서 종이 파는 곳에 가서 찾아보고, 큰 문구점에 전화를 걸어서 8절 용지 있느냐고 물어봤지만 28일 오전 현재 8절 용지를 구할 수 있는 데는 아무곳도 없습니다. 


또 하나, 공문에는 '8절 용지'로만 나와 있는데, 정확하게 하려면 종이 규격을 '8절'로만 줄 것이 아니라, 백색보조인지, 미색모조인지, 갱지인지, 중질지인지, 그리고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를 꼭 밝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국가수준 평가를 볼 때 인쇄하는 종이는 백상지도 아니고, 미색모조지도 아니고 갱지도 아닌 70g/㎡짜리 중질지를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쓰는 복사지는 너무 하얘 눈이 부셔서 문제를 푸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8절 용지'랍니다.

아마도 휴일인 28일과 29일 각 학교마다 평가 담당자들은 난데 없는 8절 용지를 구하느라 난리법석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어렵사리 8절 용지를 구한다 해도 학교에 8절 용지를 인쇄할 수 있는 인쇄기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8년째 초등교사를 해오면서 저는 학교에서 8절 용지로 평가지를 인쇄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한쪽으로는 국가수준 평가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내용이 국가수준이 안 되는 것을 형식만 국가수준으로 갖추라고 하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문제가 생깁니다.

감독을 철통같이 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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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성


두 번째 우스운 일은 시험 감독 문제입니다. 위 시행 계획에 보니 '담임 교차 감독, 학부모 보조감독제(복도감독) 시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사를 믿지 못해서 담임반이 아닌 반에 가서 감독을 해야 하고, 혹시 자녀가 있는 반이면 자녀에게 가르쳐 줄까봐 자녀가 있는 반 시험감독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학부모 보조 감독제까지 두어서 '복도감독'을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미 교실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개개인에 대한 진단평가가 다 끝나서 그에 따른 지도를 하고 있는 마당에 뒤늦게 난데없는 진단평가를 보겠다고 학부모 보조 감독제까지 두어서 복도감독까지 하라는 모습이 참으로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옵니다.

한때는 가림막조차 아이들 사이에 불신을 심어줄 수 있다고 가림막을 없애고 평가를 하라거나, 심지어 시험 감독 없는 학교를 본받으라고 부추기더니 이번에는 아이들도 교사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학부모까지 동원해서 복도까지 철통 감독을 하라고 합니다.

제가 담임을 하는 반은 시험볼 때 가림막을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가림막을 하면 아이들이 커닝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시험볼 때 보면 가림막을 해도 몰래 볼 아이들은 다 몰래 봅니다. 오히려 가림막이 몰래 커닝하는 모습을 가려줘서 가림막을 이용한 커닝기법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합니다. 대신 보지 않는 아이들은 가림막이 없어도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가림막으로 아이들 사이를 가리게 해서 괜히 먼저 아이들을 의심하면서 강제로 보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가림막 없이 자신을 믿으면서 당당하게 평가를 받는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서 심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험결과가 달라집니다. 갑자기 시험감독이 담임이 아닌 다른 교사로 바뀌고, 학부모까지 와서 시험감독을 한다면 과연 아이들이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이번 일제고사를 시행 계획대로 '대학수학능력시험 및 정기고사 시행에 준한 시험 관리'를 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고, 평가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휴업을 하고, 평가를 진행하는 시간에는 비행기도 뜨지 못하게 조치하고, 공무원 출근 시간도 한 시간 늦추기까지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민감하기 때문에 외부 조건에 따라 평가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국가수준 평가가 절대 아니라면서, 형식만 국가수준 수능시험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합니다.

난생 처음 구경하는 OMR 카드

a 3월 31일에 볼 일제고사 단계별 추진 계획 교육청에서 각 학교로 보낸 공문 붙임 자료입니다.

3월 31일에 볼 일제고사 단계별 추진 계획 교육청에서 각 학교로 보낸 공문 붙임 자료입니다. ⓒ 이부영

세 번째 우스운 일은, 이번 일제고사에서 처음으로 초등학생들에게 OMR카드 답지를 쓰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작성한 답지는 교육청에 보내 처리기관에 의뢰해서 채점하게 한다는데, 여기에 '학교 희망에 따라' OMR카드 답지를 교육청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해 일제고사 때 채점을 해 본 교사들과 옆에서 본 교사들은 채점과 입력과정이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다시는 채점을 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희망에 따라'지만 실제로는 모든 학교가 다 교육청에 답지를 보내 채점을 의뢰한다고 보면 됩니다.

문제는 초등학생들이 한 번도 OMR 카드를 써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가를 앞두고 각 학교 학급에서는 OMR카드를 구해다가 따로 시간을 내서 아이들에게 OMR 카드를 작성하는 법을 따로 공부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OMR카드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해서 초등학생들이 자신이 답한 것을 제대로 OMR카드에 정확하게 표시할 아이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이 할 때도 한 줄에 두 곳에 표시하기도 하고 한 자리씩 밀려서 쓰는 일도 많은데 말입니다.

교육과정과 평가 원칙에 보면, 평가는 교육의 과정으로 실시해야 하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OMR카드로 답을 표기해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오직 행정편의와 평가 '결과'만을 위한 것입니다.

채점은 평가자가 직접 해야

그동안 경험으로 볼 때, 어떤 평가든 채점은 평가를 하려는 사람이 직접 할 때 가장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히 서답식 문제의 경우 그 아이를 잘 알아야 왜 그 아이가 그런 답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 모르면 평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문제지에 직접 답을 쓴 것을 채점하다 보면, 정답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아이들이 문제를 풀면서 한 고민까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과정으로 그 답을 썼는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OMR카드를 사용하면 채점을 기계가 하니, 오직 기계에서 나온 결과인 점수(숫자)만 중요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묻어 있는 아이들 마음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특히 학업성취수준 평가보다 진단평가라면 더욱더 아이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그 때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OMR카드는 그런 마음을 진단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OMR카드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한들 초등학생들은 OMR카드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란히 늘어서 있는 빈 칸들을 보면 빈 칸에 색을 칠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초등학생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문제가 조금이라도 까다로우면 읽어보지도 않고 그림 그리고 낙서를 합니다. 아무리 교사가 애걸복걸해도 문제 한 줄 읽지 않고 아무 것이나 표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교사라고 해서 강제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절대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행계획에 보면 감독을 하다가 다이몬드 모양이나 하트 모양, 사선이나 대각선같이 특정한 모양을 색칠하는 학생들을 발견하면 답지 표기를 다시 하라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답지 표시를 다시 하게 하는 것이 시험감독이 해야 할 일인가요? 답을 잘못 표기했다고 쓴 답을 지우고 다시 쓰라는 것은 시험감독이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시험 감독을 잘못하는 것으로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이 모든 우스운 일들은, 누가 봐도 하지 않아야 할 일제고사를 전국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문제로, 강제로 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철통같은 감독을 하면서, 체험학습도 절대 보내지 말고, 진지하게 답을 하게 하고, 평가를 거부하는 교사는 징계를 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평가라고 한다면, 평가지 인쇄를 학교에 맡길 게 아니라 평가지를 한꺼번에 인쇄해서 주어야 마땅하지 않나요? 교과부와 시도교육청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하라면 해!'라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철통같은 감독을 하면서, 체험학습도 절대 보내지 말고, 진지하게 답을 하게 하고, 평가를 거부하는 교사는 징계를 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평가라고 한다면, 평가지 인쇄를 학교에 맡길 게 아니라 평가지를 한꺼번에 인쇄해서 주어야 마땅하지 않나요? 교과부와 시도교육청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하라면 해!'라고 합니다.
#일제고사 #진단평가 #교육과학부 #초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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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독립한 프리랜서 초등교사. 일놀이공부연구소 대표, 경기마을교육공동체 일놀이공부꿈의학교장, 서울특별시교육청 시민감사관(학사), 교육연구자, 농부, 작가, 강사. 단독저서, '서울형혁신학교 이야기' 외 열세 권, 공저 '혁신학교, 한국 교육의 미래를 열다.'외 이십여 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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