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책시렁때로는 조금 넉넉하게 비어 있다가도, 어느 때 빽빽하게 꽂히게 되는 헌책방 책시렁.
최종규
(038) 기다리기와 찾아나서기 1 : 판이 끊어진 책을 찾으려면 도서관에 갈 수 없다. 우리 나라 도서관은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책을 갖추려고 살림을 꾸준히 늘리지 않기 때문에. 드물거나 보배 같은 책을 챙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도록 학문 한길을 파던 이가 저승사람이 되고 나서 쏟아지는 책을 간수할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지 않기 때문에.
판이 끊어진 책을 찾으려면 헌책방을 찾아나서야 한다. 바라는 그날 그곳에 그 책이 있기는 어렵지만, 하늘이 돕는다면 반가이 만날 수 있다. 누군가 찾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믿으면서, 헌책방 일꾼은 책을 함부로 버리지 않으니까. 이리하여, 판이 끊어진 책을 찾고자 헌책방에 찾아오는 분들은, 헌책방 일꾼한테 쪽지를 남기며 찾아 달라는 말을 하곤 했다. 다만, 요사이는 따로 쪽지를 안 남긴다. 요사이에도 쪽지를 남기는 이들이 있으나, 하루하루 새로 생겨나는 '인터넷 헌책방' 게시판을 뒤지면서 집구석에서 셈틀 앞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인터넷을 또닥거리면서 살펴본다면, 틀림없이 훨씬 짧은 동안 더 많은 곳을 살필 수 있다. 품이며 돈이며 덜 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참말 품이며 돈이며 덜 들었을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책 하나만 찾으면 되었을 뿐일까. 우리는 왜 책 하나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판이 끊어진 다음 무엇하러 그렇게 땀흘려 책 하나 찾으려고 했을까. 책 하나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책 하나가 무어 그리 대단하기에?
(039) 어버이와 스승과 책 : 어버이는 우리한테 좋은 밥을 차려 주는 분. 그러나 차려 준 밥을 떠먹이지는 않는 분. 스승은 우리한테 옳고 바른 길을 보여주는 분. 그렇지만 하나하나 가르치며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일러 주지는 않는 분. 책은 우리한테 참살길과 즐거움과 보람을 알려주는 길잡이. 그런데 무엇이 참살길이며 어떤 즐거움이 값지고 보람이란 언제 느끼게 되는지는 낱낱이 적어 놓지는 않는 조용한 마음벗.
(040) 일본사람이 쓴 책 읽기 : 철이 없던 한동안(아직도 철은 제대로 들지 않았다고 느끼지만), 일본사람이 쓴 책은 읽지 않았다. 아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학이든 어린이책이든 인문학이든 사진책이든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일본사람 책 하나를 만나면서 내 어리석은 울타리를 내 손으로 허물었다. 내가 읽어야 할 책과 내가 안 읽어도 되는 책이란 무엇인가를 새로 헤아려야 한다고 느끼면서.
마음에 어설피 세웠던 울타리를 허물던 지난 철없던 날, 내가 손사래를 쳐야 할 책이라면, 우리를 억누르고 못살게 굴었던 '일본'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우리를 억누르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 쓴 책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를 억누르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 내가 이런 사람보다도 못나거나 모자라거나 어리석은 대목이 있으면 눈물을 머금고 고개숙이며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가까이하면서 고마이 배우면서 삭여내어야 할 책이란, 어느 갈래를 다루든 옳고 바르고 슬기롭게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책이다. 내가 꺼리면서 멀리해야 할 책이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갈래를 다루었다 하여도 돈과 이름과 힘에 끄달리는 겉발림과 껍데기 눈속임으로 떡발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