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28) 정도(程度)

[우리 말에 마음쓰기 610] '시재(詩才)'와 '시쓰는 재주'

등록 2009.04.15 10:34수정 2009.04.1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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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정도(程度)

.. 어떤 일에든 정도程度가 있기 마련이므로 말을 할 때도 먼저 정도를 잘 파악하는 게 관건이다 ..  <반 처세론>(구 원/김태성 옮김, 마티, 2005) 31쪽


'파악(把握)하는'은 '헤아리는'이나 '살피는'으로 손봅니다. '관건(關鍵)'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지요. 다만, 앞말과 이어서, "잘 헤아려야 좋다"나 "잘 살펴야 한다"쯤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 정도(程度)
 │  (1)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를 양부(良否), 우열 따위에서 본 분량이나 수준
 │   - 정도의 차이 / 중학생이 풀 정도의 문제
 │  (2) 알맞은 한도
 │   - 정도에 맞는 생활 / 정도를 넘는 호화 생활 / 정도를 벗어나다
 │  (3) 그만큼가량의 분량
 │   - 20리 정도의 거리 / 한 시간 정도의 시간
 │
 ├ 어떤 일에든 정도程度가 있기 마련이므로
 │→ 어떤 일에든 알맞는 크기가 있기 마련이므로
 │→ 어떤 일에든 알맞음이 있기 마련이므로
 │→ 어떤 일이든 알맞게 해야 좋으므로
 │→ 어떤 일이든 알맞아야 하므로
 └ …

돈도 알맞게 벌고, 일도 알맞게 하며, 잠도 알맞게 자고, 사람들과 사귀고 지낼 때에도 알맞는 거리를 지키면 좋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버는 돈은 지나치게 적게 버는 돈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을 찌들게 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하는 일은 지나치게 적게 하는 일과 매한가지로 우리 넋을 고달프게 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자는 잠이나 지나치게 적게 자는 잠 또한 다르지 않아요. 알맞는 '만큼'을 헤아릴 일이고, 알맞는 '자리'를 찾을 노릇이며, 알맞는 '크기'를 곱씹을 우리들입니다.

한자말로는 으레 '중도'나 '중용'이라 하는 '알맞음'입니다. 지난날에는 우리들이 우리 말로 이야기를 했어도 한문으로 글을 적었기 때문에, 입으로는 '알맞음'이나 '알맞춤'이나 '걸맞음'을 꺼냈어도, 손으로는 '중도'와 '중용'을 적바림하지 않았으랴 싶어요.

 ┌ 정도의 차이가 있다 → 크기가 다르다 / 높낮이가 다르다
 ├ 중학생이 풀 정도의 문제 → 중학생이 풀 만한 문제
 ├ 정도에 맞는 생활 → 벌이에 맞는 삶
 ├ 정도를 넘는 호화 생활 → 지나친 호화 생활
 └ 정도를 벗어나다 → 알맞는 자리를 벗어나다


먼 옛날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 생각했을까 궁금한데, 입으로는 토박이말을 읊고 손으로는 한문을 적는다면 어딘가 두동지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아니, 이렇게 말과 글은 달라야 한다고 느꼈을까요.

어쩌면, 말과 글은 달라야 한다고 느끼는 우리 사회였지 않았나 싶고, 이 흐름이 오늘날까지 고이 이어오면서, 입으로는 손쉽고 살갑게 주고받는 말이 되어도 손으로는 딱딱하고 어려우며 뽐내고 겉치레하는 글이 되고 말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 한 마디 알맞게 펼칠 줄을 모르고, 글 한 줄 알맞게 적어 내려갈 줄 모르는 우리들이 되어 버렸구나 싶습니다. 듣는 쪽과 읽는 쪽 모두 헤아리지 못하면서 알맞음을 잃었구나 싶습니다. 스스로 알맞춤을 버리면서, 우리 둘레 사람들한테까지도 알맞춤을 잊게 하는구나 싶습니다.

 ┌ 20리 정도의 거리 → 20리쯤 되는 거리
 └ 한 시간 정도의 시간 → 한 시간쯤 되는 시간 / 한 시간쯤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를 우리 손으로 아름다이 일구어 간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과 나누는 말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손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을 억지로 내려 하거나 이런 일거리에 손을 거든다면, 우리는 우리 삶터뿐 아니라 우리 넋과 생각과 말마저 억지로 뒤틀면서 엉망으로 짓밟는 셈입니다. 우리 스스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울타리를 쌓는 한편 무서운 무기를 손에 쥐고 평화를 지킨다는 겉발림 말을 외치는 짓을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우리 벗과 식구 모두를 우격다짐으로 비틀면서 괴롭히는 셈입니다.

제길을 찾는 삶이어야 제 말을 찾습니다. 제자리를 찾는 삶이어야 제 글을 찾습니다. 제길과 제자리 모두 잃는 삶이라면 제 말이고 제 글이고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ㄴ. 시재(詩才)

.. 특출한 시재(詩才)를 만나는 기쁨은 덜하지만, 다양하고 다채로운 재능이, 집단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느끼는 일은 .. <고유명사들의 공동체>(김정환, 삼인, 2004) 171쪽

'특출(特出)한'은 '남다른'이나 '뛰어난'이나 '빼어난'으로 다듬어 줍니다. "다양(多樣)하고 다채(多彩)로운"은 "무지개 빛깔 같은"이라든지 "저마다 다른"으로 다듬어 봅니다. "집단적(集團的)으로 상승(上昇)하는"은 "다 함께 오르는"이나 "한꺼번에 올라가는"으로 손질합니다.

 ┌ 시재(詩才) : 시를 짓는 재능
 │   - 시재가 뛰어나다 /
 │     선생님은 그의 시재를 발견하고 문학반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
 ├ 특출한 시재(詩才)를 만나는 기쁨
 │→ 남다른 시 재주를 만나는 기쁨
 │→ 훌륭한 시 하나 만나는 기쁨
 │→ 빼어난 시 작품 만나는 기쁨
 └ …

시를 쓰는 재주라 한다면, "시 재주"로 적으면 됩니다. 시를 쓰는 솜씨라면 "시 솜씨"라 하면 되고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펼칠 때 굳이 한 낱말로 뭉뚱그려야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한 낱말로 그러모으겠다면 '시재주'나 '시솜씨'처럼 적어도 됩니다.

 ┌ 글솜씨 / 글재주
 ├ 시솜씨 / 시재주
 ├ 소설솜씨 / 소설재주
 ├ 영화솜씨 / 영화재주
 ├ 그림솜씨 / 그림재주
 └ …

많지는 않으나 '글솜씨-그림솜씨'와 '글재주-그림재주'처럼 쓰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낱말 짜임새를 살피면서 우리 깜냥껏 여러모로 말을 살리고 글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 시재가 뛰어나다
 │→ 시가 뛰어나다
 │→ 시를 뛰어나게 짓는다
 │→ 시쓰는 재주가 뛰어나다
 ├ 그의 시재를 발견하고
 │→ 그가 시쓰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알아내고
 │→ 그한테 시쓰는 재주를 있음을 알아보고
 └ …

보기글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봅니다.  "시쓰는 재주"를 '시재'라고 적는들,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어 '詩才'를 말한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대로 새겨듣거나 옳게 알아들을까 궁금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가 '시' 아닌 '詩'라고 알아야 시를 잘 쓰게 될까 궁금합니다. '재주' 아닌 '才'를 알아야 자기 솜씨를 뽐내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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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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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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