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를 좋아하세요?

가장 아름다웠던 삶을 그리워하게 하는 시네뮤지컬, <미스타조>

등록 2009.04.17 13:59수정 2009.04.1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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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그리고 밤이면, 가끔 아무 맥락 없이 내가 졸업한 대학교 교정의 한 풍경이 떠오른다. 푸릇한 밤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가로등마다 몽롱한 불빛을 깨어날 무렵,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흥겹던 아까시 향기와 벚꽃잎 날던 호숫가, 서늘한 벤치. 그리고 어수룩했던 첫사랑의 기억. 그러면 나는 일부러 후닥닥 도리질을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야 한다. 그렇게라도 수선을 떨지 않으면 가닥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향하며 혼자 웃다가, 울다가, 후회하다가, 그리워하다가 하며 몸서리치는 발작으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4월, 이 무렵 밤길을 걷다보면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스멀스멀 살아나는 느낌을 끄집어내 몇 줄이라도 적어보게 된 것은 간만에 구경한 한 편 뮤지컬 때문이었다. 막을 올리고부터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라는 대사가 수십 번이나 주문처럼 읊어지다가 때 이른 태풍전야의 벚꽃 잎처럼 쏟아져 내리던 꽃가루 속에 막을 내리는 시네뮤지컬 <미스타조>.

 

a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라는 대사가 수십 번이나 주문처럼 읊어지다가 때 이른 태풍전야의 벚꽃 잎처럼 쏟아져 내리던 꽃가루 속에 막을 내리는 시네뮤지컬 <미스타조>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라는 대사가 수십 번이나 주문처럼 읊어지다가 때 이른 태풍전야의 벚꽃 잎처럼 쏟아져 내리던 꽃가루 속에 막을 내리는 시네뮤지컬 <미스타조> ⓒ EU 엔터테인먼트

▲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 ‘봄날 여섯시의 저녁향기’라는 대사가 수십 번이나 주문처럼 읊어지다가 때 이른 태풍전야의 벚꽃 잎처럼 쏟아져 내리던 꽃가루 속에 막을 내리는 시네뮤지컬 <미스타조> ⓒ EU 엔터테인먼트

오토바이 사고로 죽어 지옥(샤랄라클럽)으로 떨어지다가 천사(천국인 '하늘시'의 삐끼)의 도움으로 구출된 천하의 바람둥이 미스타조. 그는 4개월간 '결혼지옥'에서 근신하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게 되지만 하필 그가 떨어진 결혼지옥이란 죽기 직전의 데이트 상대였던 여자의 남편 몸속이었고, 4개월 사이 따뜻한 가정의 온기 속에서 알아가기 시작한 사랑과 행복의 주인이 과연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몸을 빌려준 남편인지 혼동에 빠진다. '사랑은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보거나 상상을 하면 되지만, 남편은 내가 선택한 삶'이라는 아내의 고백을 듣고부터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랑이라는 느낌의 원형'인 '봄날 여섯 시의 저녁 향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극인지, 해피엔딩인지 분명치 않은 결말. 그리고 무대 뒤 스크린에 새겨지는 엔딩크레딧. 사랑이란, 봄날 여섯 시의 저녁향기처럼,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기억이다.

 

<미스타조>는 2007년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 공모에 당선된 데 이어 2008년 고양 호수예술축제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창작뮤지컬이다. 단편영화를 만들어온 이경아 감독이 직접 쓴 대본으로 연출했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한 이영임이 음악을 맡았다.

 

'시네 뮤지컬'을 표방한 <미스타조>의 스토리 전개는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 못지않게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에 의존한다. 주인공들이 지나온 어떤 시간을 회상할 때, 혹은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때 때로는 단편영화처럼, 때로는 뮤직비디오처럼 편집된 영상은 간혹 조금씩 겉도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표현의 영역을 어느 만큼씩은 확장하는 효과를 얻기도 한다.

 

타이틀롤을 맡은 에스진(본명 함규훈)은 '백번을 불러도'와 '다가갈게요'를 통해 '달콤한 목소리'로 은근히 이름난 가수답게 '낭만적인 바람둥이'다운 연기와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의 사고뭉치 조연출 역을 통해 연기입문을 했던 왕년의 고교생스타 판유걸 역시 '하늘시 삐끼' 역할을 맡아 매력적인 감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이란 가장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기억이고 그리움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그저 공허한 몽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날 여섯 시의 저녁 향기는 어느 싱그러운 아침의 된장찌개냄새로 이어지고, 어느 지치고 피곤한 밤에 마주한 식탁의 맥주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삶이란 후회와 그리움 속에서 나풀나풀 흔들리며 결국 '저녁향기 날리던 봄날 여섯시'를 향해 돌아가는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a 사랑은, 아름다웠던 삶의 기억이다 무대 뒤 스크린에 새겨지는 엔딩크레딧. 사랑이란, 봄날 여섯 시의 저녁향기처럼,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기억이다.

사랑은, 아름다웠던 삶의 기억이다 무대 뒤 스크린에 새겨지는 엔딩크레딧. 사랑이란, 봄날 여섯 시의 저녁향기처럼,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기억이다. ⓒ EU 엔터테인먼트

▲ 사랑은, 아름다웠던 삶의 기억이다 무대 뒤 스크린에 새겨지는 엔딩크레딧. 사랑이란, 봄날 여섯 시의 저녁향기처럼,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기억이다. ⓒ EU 엔터테인먼트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밤 여덟 시 무렵, 그리고 공연장을 나서는 열 시 무렵, 봄비가 지나간 구로아트밸리의 공기가 맑았고, 여섯시의 향기는 없었지만 마음은 내가 졸업한 대학 캠퍼스의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내일 아침의 된장냄새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추억이란, 사랑이란, 과거에서 흘러나와 내일을 살 힘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 절반쯤 진행되기 전까지는 이야기전개를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하는 흠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봄날 여섯 시의 저녁향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라면, 상쾌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공연이다. 공연은 26일까지 이어진다. (평일 8시, 토요일 3시와 6시, 일요일 3시 / 구로아트밸리)

 

a 미스타조 <미스타조>는 2007년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 공모에 당선된 데 이어 2008년 고양 호수예술축제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창작뮤지컬이다. 단편영화를 만들어온 이경아 감독이 직접 쓴 대본으로 연출했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한 이영임이 음악을 맡았다.

미스타조 <미스타조>는 2007년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 공모에 당선된 데 이어 2008년 고양 호수예술축제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창작뮤지컬이다. 단편영화를 만들어온 이경아 감독이 직접 쓴 대본으로 연출했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한 이영임이 음악을 맡았다. ⓒ EU 엔터테인먼트

▲ 미스타조 <미스타조>는 2007년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 공모에 당선된 데 이어 2008년 고양 호수예술축제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창작뮤지컬이다. 단편영화를 만들어온 이경아 감독이 직접 쓴 대본으로 연출했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한 이영임이 음악을 맡았다. ⓒ EU 엔터테인먼트

#미스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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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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