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의 1위'로 들뜬 광주, 화가 치밉니다

<동아> 보도로 지역 떠들썩...현직 교사가 본 수능 성적 공개

등록 2009.04.17 21:28수정 2009.04.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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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이 '수능고을'로... <동아일보> 16일자 1면 머리기사
'빛고을'이 '수능고을'로...<동아일보> 16일자 1면 머리기사 동아PDF
▲ '빛고을'이 '수능고을'로... <동아일보> 16일자 1면 머리기사 ⓒ 동아PDF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하나에 광주가 떠들썩합니다. 최근 5년간 수능 성적 '부동의 1위'라는 찬사에 '빛고을'보다 '수능고을'이라는 이름을 더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입니다. 해당 신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조차도 내심 뿌듯해 하며 기사 내용에 맞장구치고 있습니다.

 

수능 성적 1위라는 '결과'는 모두가 수긍하는 우리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조차 단숨에 아름답게 치장해 버렸습니다. 학교마다 밤 10시가 넘도록 강제되는 이른바 '야자'는 아이들의 '학원행'을 막고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적 방법으로 묘사하고, 아이들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며 시도 때도 없이 치러지는 모의고사를 두고는 '교육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가슴 뭉클해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고등학교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고 배정 전부터 치졸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지는 등 보기조차 부끄러운 상황이 아이들 앞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데도, 학교 간의 경쟁이 '광주의 힘'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으니 읽기조차 민망합니다.

 

'광주의 힘' 읽기조차 민망합니다

 

이태 전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업은 물론 시험 점수조차 예체능 과목을 수능 과목 수업으로 대체한 사실이 적발돼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일부 학교의 문제로 치부돼 두루뭉수리 넘어갔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1학년 과정만 지나면 예체능 수업 시간에 자습을 유도하는 등 수능 과목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는 점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수업을 진행하려다 '수능 과목 공부하도록 도와달라'는 아이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어느 예체능 과목 교사의 푸념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놀랍지도 않습니다. 예체능 과목 교사는 수능 과목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저 지친 아이들에게 휴식 시간을 제공해주는 '보육 교사'일 뿐입니다.

 

이번 지역별 수능 점수 공개는 학교 현장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수밖에 없습니다. 수능을 위해서라면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되는 현실에서 학교생활기록부, 수행평가, 봉사점수, 독서이력제 등 우리 교육의 틀을 나름대로 바꿔보려는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과 노력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과거로의 완벽한 회귀입니다.

 

20여 년 전 고등학교 재학 시절, 담임교사 수당과는 별개로 학급에서 서울대 진학자 수에 따라 건당 얼마씩 상여금이 주어진다는 소문이 학생들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듯 여겨졌던 학부모들의 찬조금이 그렇게 쓰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졸업할 즈음이었습니다. 교사든 학교든 이른바 '실적'이란 아이들의 명문대 진학률이었고, 방치된 대다수의 아이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경축 현수막'은 예나 지금이나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부동의 1위'가 달갑지 않은 이유

 

이제 와서는 학교를 넘어 유력한 신문사까지 나서서 1면 머리기사로 실어 '명문'과 '실적'을 떠들어대며 부추기고 있으니, 20여 년 전보다 더하다는 느낌입니다. 그것이 교사, 학교 간의 진정한 '교육' 경쟁이 아니라 오로지 점수 올리기 경쟁으로 치달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숨 막히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 불보듯 뻔한데도 그들은 애써 모르는 체 합니다.

 

우습지도 않게, '학력 신장'이라는 목표 앞에서 '이념'이 설 자리가 없었다고 썼지만, 열 명 중 세 명꼴이라는 광주 지역 전교조 교사들은 적어도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을러대며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애향심을 강조할지언정 '한풀이 하듯 공부하라'는 말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설령 전교조 교사 비율이 높아 수능 성적이 좋다고 써도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전교조가 밉다기로서니 전교조 교사들도 광주 지역에서는 '점수 앞에 무릎 꿇었다'는 식의 해석은 노골적인 폄훼이자 왜곡입니다.

 

유력 신문의 머리기사에서 '부동의 1위'라고 칭찬하는데도 전혀 달갑지 않고 외려 화가 치미는 것은, 퇴행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무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아이들의 쾡한 얼굴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터무니없는 얘기로만 여겼던 중학생들의 '야자'와 초등학생들의 월말고사 실시 계획이 이곳저곳에서 적잖이 들려옵니다.

 

광주시교육청이 발간할 다음 달 소식지에 이 기사가 어떻게 해석돼 실릴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짐작하건대 '실력 광주의 결실'이라거나 '광주의 힘, 전국 강타' 따위가 표제가 돼 온통 도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9.04.17 21:28ⓒ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수능성적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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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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