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역사학자와 이론물리학도의 대화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35] '화첩을 보며'

등록 2009.04.19 10:29수정 2009.04.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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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뒤란의 작은 문을 통해 이두오의 움막으로 걸어갔다. 달이 유난히 밝았다. 배 향기와 흙 내음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북악의 숲에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내러오고 있었다. 이두오는 역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별을 보고 있는가?"

"아닙니다. 오늘은 유난히 달이 아름답군요."

 

김성식은 이두오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져 보았다.

 

"이군, 저 달에는 토끼가 사는가?"

 

이두오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저 토끼 모양은 무엇인가?"

"바다입니다."

"물이 있다는 건가?"

"편의상 바다라고 하는 것이지 달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다면 생명체도 없겠지?"

"낮과 밤의 온도가 각각 영상 100도, 영하 150도가 넘습니다."

"그럼 저기 토끼 말고 환한 부분은 뭔가?"

"편의상 대륙이라고 합니다."

 

"대륙이라, 그런데 달빛은 왜 저리 아름다운가?"

"대륙 부분이 태양빛을 환히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달 자체에는 빛이 없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달은 별과 달리 자체의 빛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런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가?"

"동물 하나와 식물 하나가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뭐라고?"

"토끼와 계수나무입니다."

 

"자네는 일단 멀리 있는 것은 모르는 게 없군."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나으이. 나는 가까이 있는 것도 아는 게 전혀 없으니까."

"선생님!"

 

"왜 부르나?"

"혹시 그 말 들으셨나요?"

"무슨 말?"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말요."

 

"처음 들어보는데…."

"꼭 말년의 아인슈타인처럼 고집을 피우시는군요?"

"자네는 그 말 들어 봤나?"

"어떤 말요?"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생각을 버려라."

"불교철학이군요?"

"<구운몽>에 나오는 말이지."

"양자역학과 통하는 말입니다."

 

"물리학에도 그런 게 있나?"

"물리학이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학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걸 알아내는 것이 물리학입니다."

 

"그럼 자네도 아직 모르는가 보군?"

"모르니까 알려 하지 않는 척하는 겁니다."

"자네가 나보다 수가 높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자네는 안 되는 것인 줄 알고 지레 알려 하지도 않는데 나는 되지도 않을 걸 한사코 알려 하니 내가 미련한 것이지."

"선생님이 더 정직하신 겁니다."

 

"자네 그 말 들어 봤나?"

"무슨 말요?"

"과찬은 비례라는 말."

"그건 지금 들어 봤습니다."

 

"자네, 기다려 줄 수 있나?"

"뭘 기다린단 말씀입니까?"

"내가 집에 가서 숨겨 둔 술을 가져오는 걸 말일세."

"기다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술을 마시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소리로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 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치이는 건/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일본 왕만큼이나 신격화되는 김일성

 

조수현은 창을 통해 정릉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방금까지 읽었던 라이프 지와 인민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 번 가 버린 백로는 이제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전쟁 초기만 해도 이따금씩 눈에 띄던 빨래하는 아낙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녀 역시 전쟁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 초기만 해도 전쟁의 명분에 동감했었다. 친일파와 미제에 아부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남반부는 그녀가 보기에 결코 온당치 않았다. 김구와 여운형과 송진우 등의 지도자들이 줄지어 암살당하는 남반부는 무질서한 폭력의 현장이었다.

 

그녀는 이승만 정권이 제주에서 3만 명이나 죽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항쟁을 반란으로 규정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었다.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며 제주 파병을 거부하는 여수· 순천 일대의 좌익 군인들 역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대부분 일제 군인이거나 경찰 출신이라는 데에 있었다. 그러던 자들이 미국을 믿고 기습 북침까지 했다면 공화국으로서는 마땅히 응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록 동족끼리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불가피하다고 여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감찰 군인으로 활동하며 접한 정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잘 몰랐던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쟁의 발발만 해도 북침이 아닌 남침인 것 같았다. 게다가 2주일이면 끝낸다던 전쟁이 세 달째 접어들면서 답보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까? 반면에 김일성 개인에 대한 예찬은 거의 우상숭배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김일성은 일본의 천황만큼이나 신격화되고 있었다.

2009.04.19 10:29ⓒ 2009 OhmyNews
#구운몽 #양자역학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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