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어. 너 안 날어가게 아부지가 꼭 잡을 것잉께."
아버지는 한 손에 새끼줄 사리를 든 채, 다른 손으로는 내 손목을 나꿔 잡고서 초가집 모퉁이를 돌아 뒤란으로 갔다. 빗방울을 동반한 바람이 뺨이 얼얼하도록 몰아쳤고 가끔씩 천둥소리가, 흡사 뒷산의 바윗돌이 온통 부서져 굴러 내리는 것처럼 지축을 울렸다. 그러나 비도 바람도 천둥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 것은 아버지에게 붙잡힌 손목을 통해 전해져 오는, 정체가 아리송한 따땃함이었다. '따뜻함'이나 '따스함' 혹은 '온기(溫氣)'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따땃한'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로부터 30년쯤이 지난 뒤, 나는 꼭 그만한 나이의 딸아이 손목을 잡고 공원을 걸으면서 '내가 이 아이에게 사라호 태풍 때의 아버지만큼 따땃한가'를 반문해 보았다. 아닐 것이었다. 당시와는 세상의 온도가 너무 달랐으므로.
아버지는 새끼줄을 적당한 길이로 토막 낸 다음, 그 한 끝을 서까래 끝에 묶고 다른 쪽 끝에다가는 장작개비를 묶어놓고서 짚단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가 새는 곳을 가늠하여 짚으로 땜질을 한 다음 아래쪽에서 떨고 있는 날 향해 소리쳤다.
"선호야, 그 화목(火木) 개비를 시게 땡게 봐!"
나는 새끼줄을 매단 장작개비를 나름으로는 온힘을 다하여 세게 지붕으로 내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내 이마에서 번쩍, 번개가 일어났다. 난 그만 땅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바람에 되 날려 온 장작개비가 내 이마를 정통으로 맞힌 것이었다.
"뭣 하고 있는 것이여, 빨리 땡기랑께!"
어두웠으므로 아버지는 내가 당한 수난을 알 리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러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던졌다. 아버지가 더듬더듬 거의 추녀 끝까지 내려와서 장작개비를 집어 새끼줄을 당겼다. 아버지는 그 새끼줄로 지붕을 누르고서는, 그 끝을 다시 앞마당으로 늘어뜨린 다음에 마당으로 내려와서 이번엔 기둥에 묶는 작업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 난 수도 없이 장작을 던졌고, 수도 없이 땅바닥에 자빠졌으며, 때로는 돌담 밖으로 날아갈 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모든 남자아이들이 커서 아버지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 힘든 아버지 노릇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지붕 단속이 어설펐던지, 아버지와 내가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여전히 양은대야며 놋요강 따위를 번갈아 가며 빗물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아랫목 구석에 담요를 돌돌 말고 앉았다. 장작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온몸에 불이 났으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내 몸이 뜨겁다고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늘은 여전히 성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번개가 휘번쩍, 구멍 송송 뚫린 창호지 문에 빛 세례를 퍼붓고 나면 나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쯤을 어림하여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내 나름으로 터득해낸, 천둥의 공포를 이겨내는 비법이었다.
갓 여섯 살이었으므로, 사라호가 생일도에 어느 만큼의 생채기를 남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마당 끝 돌담에 턱을 고이고 내려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바닷가 선착장이 간 곳 없이 증발해버렸다는 것과, 거기에 묶여 있던 여남은 척의 거룻배들이 종적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햐아, 이 나이 되드록 이번 같은 징한 태풍은 첨이랑께 그래.
-집채 만한 도팍을 운반해서 쌓아논 선착장이 하룻밤 새에 날어가부렀다면 할 말 다 했제.
-그라먼 자네 배도 이참에 다 뿌수가져부렀는가?
-아녀. 우리 배는 안녕하당께.
-선창에 배가 한 척도 안 남어 있든디 자네 배가 안녕히 잘 있다고?
-선창에 묶어놓은 배를 노부리(파도)가 덥석 들어다가 쩌그 선창 위 논바닥에다가 곱게 모셔다 놨드란 말시. 우리 조부님 묏등을 잘 쓴 덕분 아니겄어, 허허허.
실제로 태풍이 가신 다음에 바닷가에 내려가 본 적이 있는데 광식이네 배는 선창으로부터 30여 미터를 날아서, 논바닥이 본시 제 집인 양 똑바로 앉아 있었다. 내가 얼핏얼핏 귀동냥한 바에 따르면 그 때 동네에서 가장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우리 큰집(아버지는 셋째 아들이었다)에서는 멸치어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라호 때 어장의 그물이 모두 못 쓰게 돼버리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사라호 태풍에 대한 내 기억 중에서 두고두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대목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밤,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깨었는데 밤늦게 집에 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풍의 뒤처리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내용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이번 태풍으로 손해 본 사람들, 정부에서 보상해준다는 말이 참말이라우?
-아, 그래서 군청하고 멘사무소에서 피해 보고하라고 공문이 날어오고… 메칠 뒤에 조사반이 우리 동네에 피해조사를 하러 나온다는디…
-그라먼 우리도 이녁이 이장잉께 잘 보고를 해서 보상을 조깐 받었으면 좋겄구먼…
-우리가 피해본 것이 뭣인디? 초가집 지붕 허술해서 비 샌 것? 씰 디 없는 소리 하고 있어. 안 그래도 조사반 나온다고 항께 암시랑토 안 하든 지붕을 일부러 헐어뿔고, 성한 배(船) 고물을 부러 못 씨게 맹글어 뿐 사람들이 있어서 속 터져 죽겄구먼.
-에이, 일부러 그라기야 할랍디껴.
-참말이랑께 그래.
그러니까 사라호 태풍에 대한 내 기억의 뒤끝은, 그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 말고도, 있는 것을 없게도 하고 없는 것을 있게도 하려는 어른들의 이상스런 행태를, 아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천둥소리며 성난 파도소리며 방안의 양재기로 떨어지는 빗소리며… 태풍에 대해 떠올릴 거리들이 지천인데, 갓 여섯 살 난 꼬마아이가 어쩌자고 그런 부조리한 내용의 대화까지 기억의 창고에 쟁여 두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우리 집, 그러니까 누나와 나와 선길이와 선유가 태어나 자랐던 그 집을 누군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집 바로 아래에 우리가 새로 들어가 살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집이 낡아서 새 집을 짓는 것이라 얘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머니는 '느그 아부지가 이장 하다가 망해서 살던 집을 내주고 할 수 없이 이사 갈 집을 짓는 것'이라 했다. 나는 집안을 망하게 하는 이장 따위는 앞으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그러나 저러나 새 집이 생긴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너, 뭣 할라고 그런 것을 미고 나오냐?"
망태를 메고 나서는 나를 보고서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무하러 갈라고."
내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으므로 어머니는 그냥 웃기만 했다. 망태를 멨다고 했으나 사실은 망태의 멜빵을 어깨에 걸쳤을 뿐 밑바닥은 땅에 붙어 있었다. 난 고놈을 질질 끌고 새집을 짓고 있는 현장으로 내려갔다가 대팻밥 따위를 담아 어깨에 걸치고서 다시 낑낑거리며 윗집으로 올라왔다. 마음이 뿌듯하였다. 모처럼 작은 소망 하나를 성취한 셈이었다. 그 무렵의 나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았다.
망태 다음에는, 내 몫의 지게를 가지는 것이 두 번째 소망이었다. 내 지게가 생긴다면 뒷산에 올라가서 근사하게 나무를 한 짐 꾸려 지고 내려올 것이다. 그 나뭇짐 앞쪽에다 진달래나 철쭉 다발을 꽂고서, 비탈바지 산길을 너푸너풀 내려올 것이다. 희동이 형처럼 낫자루로 지겟다리를 두드리며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을 불러 젖히면 얼마나 신날 것인가. 그러나 그러자면 우선 더 커야 할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해보고 싶은 일은 소 먹이기였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우지 않았다. 만일 소를 키우게 된다면, 그리고 녀석을 먹이는 일이 내 몫으로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동네 형들 중에는 소를 잘 길들여서 내 몸인 듯 능숙하게 부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소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올 때 보면, 고삐는 아예 쇠잔등에 올려 척 걸치고서 이랴! 자랴! 워어! 그 세 마디 구령만으로 소의 진로를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제자리에 멈추게도 했다. 나는 사립에 서서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침을 끌꺽 삼켰다.
'담에 나도 꼭 해봐야제.'
집짓는 현장은 며칠째 시끌벅적 요란하였다. 집터를 다지는 일이며, 목수의 지시를 받아 재목으로 쓰일 나무들을 톱으로 자르고 도끼나 끌로 깎아 내거나 구멍을 뚫는 일들을 모두 마을 사람들이 힙을 합쳐 해내고 있었다.
"앗다, 우리 선호가 어느새 요렇게 커서 망태 미고 땔나무를 가지러 왔네 이. 너, 내가 대팻밥이랑 한 망태 담어 줄 것잉께, 그 대신 노래 한 자락 배워볼래?"
기둥에다 끌로 홈 파는 일을 하고 있던 진수네 큰형님이 끌질을 멈추고 은밀하게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나직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노래는 2절까지 있었는데 워낙 가사나 곡조가 단조로워서 금세 외울 수 있었다.
"이선호, 너는 천재다, 천재여."
"그란디, 그 노래를 나한테 왜…"
"쉬잇, 너도 인자 얼마 안 있으면 학교에 갈 것 아녀. 학교 가서 산토끼나 송아지 그런 것만 불르면 시험 점수도 쪼깐밲이 안 나오고, 가시나들한테 인기도 없당께. 내가 갈쳐준 요놈을 탁 불러놓으면 선생들하고 학생들이 환장할 것이여."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수네 형님은 내 망태에 대팻밥을 되는대로 우겨넣고서 나를 못 가게 붙잡은 다음, 길가 쪽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 희갑이네 큰누나가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지금이여. 아까 갈쳐준 그 노래 말이여, 여그 일하는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불르는 것이여. 알겄제? 자, 시이작!"
나는 진수네 형님이 지시한대로 목청을 돋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건네 저 가이내 앞가심을 보아라
영쿨 없는 호박이 두 통이 열렸네
일하던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있는 나와, 그리고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희갑이 누나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진수네 형님은 내 몸을 휙 비틀어서는 아예 희갑이 누나 쪽을 향하게 한 다음에 2절을 부르게 했다. 나는 작업장 인부들의 예사롭지 않은 호응에 용기백배하여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저 건네 저 가이내 엎으러져라
일쎄준 척 한데키 보듬어보자
노래를 부르면서 얼핏 희갑이 누나 쪽을 건너다봤는데 때마침 달려든 석양빛을 받아 얼굴이 치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진수네 형님은 희갑이 누나가 돌담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내가 쓸모가 없어졌는지 집에 가라 했다. 노래 가사 중에 웃음보가 터질 만큼 이상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어른들이 웃어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희갑이 누나의 얼굴이 왜 빨개졌는지는 그런대로 짐작이 갔다. 나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져봐서 아는데 부드럽고 예쁘고 포근하였다. 그런 가슴을 울퉁불퉁 못 생긴 호박이라고 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2절 가사는 더 문제였다. 보듬고 싶으면 그냥 다가가서 '조깐 보듬어 봅시다이' 하면서 보듬으면 될 것이지 바닥에 넘어지게 해서 일으켜준다는 핑계를 댈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길바닥을 내달리다가 철푸덕 넘어졌을 때, 한 동안 숨을 쉴 수 없던 그 고통은 나도 이미 여러 차례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그 노래가 구전민요인 '산아지타령'이라는 사실은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섯 살짜리 꼬마였던 나로 하여금 집짓는 현장에서 느닷없는 '신곡발표'를 하게 했던 진수네 형님이, 내가 2학년 2학기였을 때 바로 그 희갑이의 누나와 결혼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희갑이 누나의 앞가슴을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싶고, 또 엎으러지게 하지 않고도 언제든 보듬고 싶어서 희갑이 누나에게 떼를 써서 신랑 각시가 되지 않았을까?
"선호야 너도 인자 국문을 배워야제."
아버지가 동아일보를 마룻바닥에 펴놓고 한글로 된 부분들을 짚으면서 말했다. 이제 말과 몸짓과 소리로만 이어지던 내 일상에 문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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