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 스님의 거처인 운해당. 부설 거사의 거처가 있었다면 저 자리 쯤 있지 않았을까.
안병기
부설 거사의 전설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이곳에 처음 자신의 딸 월명을 위해 암자를 지어준 월명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이곳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불교 소설인 부설전(浮雪傳)은 그가 신라 진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본명이 진광세(陳光世)였다고 전한다. 법명을 부설, 자를 의상(宜祥)이라 했다. 변산에다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정진하던 그는 친구인 영조, 영희와 함께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김제에서 묘화라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함으로써 파계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오대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영조와 영희가 부설을 찾아왔다. 세 사람은 누구의 수행의 깊이가 더 깊은지 거량해보고자 물병 세 개를 달아놓고 하나씩 쳤는데, 부설의 병만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부설은 자신의 도의 깊이가 인정받은 것보다 자신이 택했던 사랑의 정당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더욱 감격스러워했을는지 모른다.
열반을 앞둔 부설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 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絶是非) 귀에는 들리는 소리 없어 시비가 끊어졌네.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시비와 분별을 모두 놓아버리고단관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 다만 내 마음의 부처님을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 - 부설거사(浮雪居士)의 게송
부설 거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린 굳이 승속(僧俗0을 차별하지 않는 중생구제사상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선 은근히 대처승의 정당성을 표방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부설 거사는 중이 처와 자식을 두었다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시비와 분별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내 마음의 부처님을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는 구절은 혹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역정을 돌아본 구절이 아닐는지.
그러나 부설 거사는 그런 역경을 딛고 용맹정진하여 끝내 한 소식을 얻었다. 부설거사의 전설은 우리에게 사랑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준다. 사랑을 하려거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과 하라는. 만일 묘화라는 여인이 부설의 길을 반대했다면 부설이 어찌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었겠는가.
전각들을 두루 들여다보고 나서 요사 앞을 지나려는데 "어디서 오셨느냐?"고 늙은 보살이 말을 건넨다. 그러더니 안으로 들어와 점심 공양이나 하고 가라고 권한다.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요사 안에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원 이렇게 인심이 좋아서야. 자칫 절 살림을 말아먹을 보살이로군." 공양도 머슴 밥그릇만큼이나 고봉으로 수북이 담겼다. 서둘러 공양을 마치고 나서 맘씨 좋은 보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