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없이 대학 졸업...번역가와 소설가로 나서다

[인터뷰] <병 속에 든 바다>의 저자 김지현씨

등록 2009.05.19 22:02수정 2009.05.1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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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기업 상반기 취업시즌도 서서히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서류전형 ○전 ○패', "○○기업 합격 스펙 좀 알려주세요"와 같은 고민글이 각종 취업 카페 게시판을 가득 채우는 지금, 졸업을 앞둔 7, 8학기 대학생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토익 900, 인턴, 해외연수, 사회봉사활동 등, 이력서 칸도 훌륭하게 다 채워 넣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성토하는 그들. "아무데나 합격만 시켜준다면 감사하다"며 영업직, 마케팅직, 경영지원직 가리지 않고 이 회사 저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병 속에 든 바다>의 저자 김지현씨(25세, 번역가)도 작년 겨울까지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내고, 서류가 붙으면 면접을 봤다. 그러나 '인문학을 전공한 여학생'이라는 한계는 칼날 같은 취업전선에서 그녀를 매섭게 내쳤다. 지원가능한 직군도 영업관리직 뿐이었지만, 그나마도 여학생은 잘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2009년 2월, 그녀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15일, 인터뷰를 위해 홍대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오히려 발랄해 보였다. 최근, 대학시절 써온 단편들을 모아 <병 속에 든 바다>라는 e-book을 출간했다는 김지현씨. 빨간 재킷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그녀와 함께 취업과 꿈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눈만 높아서 실직자? 그런 기사 보면 화가 나요"

-현재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번역을 하고 있어요. 소설도 틈틈이 쓰고 있지만, 번역이 아직까지는 주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김지현 씨. 빨간 재킷을 멋스럽게 차려입고 취업과 꿈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이 당당해보인다.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김지현 씨.빨간 재킷을 멋스럽게 차려입고 취업과 꿈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이 당당해보인다. 이유진
-번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죠?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원래는 취업을 하려고 했었어요. 부모님께서도 제가 취업하기를 원하셨고, 돈도 벌어야 했고. 또 제 꿈이 원래 소설가인데, 사회생활을 해 봐야 경험도 쌓고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작년부터 경기가 많이 안 좋아졌잖아요.(웃음) 그래서 취업에 실패를 했죠. 그 후에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도대체 뭘 해야 할까. 2월에 졸업을 했으니까, 아예 취업 쪽으로 나갈 거라면 상반기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년에도 안됐는데, 올해라고 될까? 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올해는 더 힘들 거라고 하고요. 사실 저는 취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거든요. 하고 싶은 일까지 포기하면서 중소기업에 취직을 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어차피 돈을 많이 못 버는 건 둘 다 같은데, 이왕 힘들 거라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  는 게 낫잖아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어떤 종류든 '글'쓰는 직업을 갖겠다고요. 그러고 나니까 번역이 딱 눈에 들어왔어요. 그동안 '언어'를 너무 좋아해서 영어공부, 한국어공부를 열심히 해왔거든요. 번역이라면 제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겠다 싶었죠."

-번역이라는 직업이 일을 구하는 데 있어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일 구하시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네. 아무래도 번역일은 대기업 채용과는 확실히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죠. 인맥이나 이런 것들이 중요해요. 그렇지만 저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웹진에서 필진으로 활동해왔고, 출판․소설 계통에서 꾸준히 인맥을 쌓아왔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예요. 물론 번역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번역에 필요한 훈련을 받을 필요는 있었지만요.(웃음)"


-그렇지만 번역일은 대기업에 비해서 소득이 낮지 않나요?
"하하.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저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페이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요. 워낙 글 쓰는 쪽이 돈 벌기가 힘들잖아요. 그런데 일을 하고보니 수입이 꼭 낮기만 한 건 아니더라고요. 프리랜서라 자기가 시간 관리하기 나름이거든요. 경험 많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들은 웬만한 대기업 연봉수준으로 벌기도 해요. 그렇지만 저는 아직 초보니까, 저렴하게 살고 있죠.(웃음)"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20대가 취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번역의 길로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현재의 취업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즘 20대 취업준비생들을 놓고 말이 많죠. '루저문화다, 꿈도 도전정신도 없다, 중소기업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눈만 높아서 실직자인거다'라는 식으로요. 그런 기사나 칼럼을 보면 정말 화가 나요. 오늘날 20대의 현실을 알고나 하는 말인지…. 오늘날의 취업난은 20대가 의욕이 없어서, 혹은 눈이 높아서 벌어진 게 아니잖아요.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을 20대 개인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언론이나 기성세대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와요.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눈이 높아서 실직자인거다'라는 비난에 반박하자면, 저도 취업 준비할 때, 왜 대기업만 고집하느냐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잘 안되면 중소기업에서부터 시작하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서울에서 이름 들으면 다 알만한 대학 다니는 애들이 중소기업에 지원하면 기업에서도 잘 안받아줘요. 좋은 학교 졸업한 학생들은 중소기업에서 경력만 쌓고 나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실 우리도 지금까지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공부해왔는데, 적은 연봉부터 시작하고 싶지는 않잖아요. 대기업 연봉도 외국에 비하면 크게 높지 않은데, 중소기업이면 더 심하겠죠. 아니, 중소기업에서 시작해도 쑥쑥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만 형성되어 있어도 이렇게 대기업만 고집하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첫발을 어디에 담그느냐가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 첫발에 따라서 앞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생활수준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이런 사회적 분위는 고치지 않으면서 무작정 20대를 비난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김지현씨도 현재 번역을 하시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지는 않다고 하셨는데, 중소기업 연봉이 적어서 싫으신 거라면 번역일도 싫어하셔야 되지 않나요?
"음, 그건 서로 다른 문제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취업'은 원래 제 뜻이 아니었거든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번역을 하기로 결심한 건 이왕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을 많이 못 벌 바에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또 글도 쓸 수 있고요."

"공무원 교사에만 매달리는 거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거죠"

<병 속에 든 바다>표지 최근 김지현 씨가 발간한 e-book
<병 속에 든 바다>표지최근 김지현 씨가 발간한 e-book이유진
-그렇군요, 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생들 혹은 취업준비생들이 대기업취직 혹은 공무원, 교사와 같은 미래에만 매달리는 걸까요? 혹시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진부한 얘기지만, 결국은 교육 때문이죠. 초․중․고를 거치면서 우리가 배운 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까?'가 전부잖아요. 세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나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지 등은 늘 관심 밖이었죠. 또 사교육이 과열되면서부터는 이 학원 저 학원 휩쓸려 다니면서 학원 책상에 가만히 앉아 수업만 듣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거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은 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국영수만 죽어라 공부하는 우물 안 개구리요.

대학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마케팅 동아리, 공모전 동아리, 사회봉사 동아리 등 취업준비용 동아리들이 넘쳐나죠. 신입생 붙잡고, '너도 좋은 데 취직하고 싶으면 지금부터 영어, 중국어 공부하고 자격증 따놔"라고 충고하는 선배들도 있어요. 결국 갓 입학한 애들도 도서관에 처박혀서 취업준비 하게 되는 거죠.'"

-결국 꿈을 찾을만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군요?
"네 그렇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번역 일만 해도 그래요. 저야 인맥이 있어서 조금 쉽게 해결했다 치더라도 인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힘들죠. 번역가를 양성하는 인프라가 너무 부족해요. 번역 일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몰라서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직업정보 제공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꿈 찾기를 어렵게 만드는 문제 인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그 기반이 잘 마련될 수 있을까요?
"하하. 글쎄요. 우선은 교육부터 잘 해결이 되어야겠지만, 최소한 어떤 직업이 있는지,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라도 잘 공유되었으면 좋겠어요. 직업교육도 함께 이루어지면 더욱 좋겠고요. 제조업, 금융권, 유통 등 대기업 중심의 일자리에 대한 정보는 많은데 그 밖의 다른 일에 대한 정보는 너무 부족하잖아요. 잘 알지 못하니까 꿈도 못 꿀 수밖에요. 아니면 대학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선배들과 학생들을 멘토와 멘티로 이어줄 수도 있겠죠. 현재는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만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걸로 알거든요."

-네. 그럼 취업 얘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요, 끝으로 취업 준비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자신감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취직이 안 되는 건 절대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취업도 좋은 길이지만, 취업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넓게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서태지 팬인데요(웃음), 서태지씨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 현재 바라보고 있는 '취업의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는 걸 알고, 당당하게 살아나가기를 바라요."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음…. 최근에 단편을 하나 마쳤어요. <밤의 공원에 가면>이라는 제목의 환상소설인데요, 단기적으로는 이렇게 쓰고 있는 단편들을 모아서 또 한 번 출판하고 싶어요. 또 지금 번역하고 있는 좀비소설 <데이바이데이 아마게돈>도 멋지게 완성하고 싶고요. 중장기적으로는, 사실 어쩌다 보니 장르문학에 먼저 발을 붙이게 되었지만, 저만의 세계가 담긴 글을 써낼 수 있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하. '미래에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저 스스로도 많이 하는 거지만, 그런 글감들은 살면서 떠오르는 거니까, 지금부터 제 글을 한정짓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다양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거친 취업전선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짜 꿈'을 찾아 나선 김지현씨.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취업실패자가 아니라, 이 시대의 꿈꾸는 청춘이었다.
#88만원세대 #꿈 #번역가 #김지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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