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교수, 정규직 교수, 학생, 변호사, 학부모, 언론인 등 32명이 대한민국 대학 강사 문제에 관하여 쓴 글을 모았다.
이후
난 시간강사다. 학교에서 '교수님'이라고 불리지만 바깥에서는 '보따리 장수'라고 불린다. 서른이 넘어 박사학위를 땄고 마흔이 넘었는데도 12년을 강사로 보냈다. 공부가 좋아 마음먹은 일이지만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교수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를 온몸으로 체화했다.
유학은 외롭고 모진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미래를 기대하며 묵묵히 견뎌냈다. 하지만 결국 내 앞에는 보따리 싸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만 남았다. 학생들이 '교수님'이라 부를 때마다 속으로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의 교수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둘로 나뉘어 있다.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를 정규직이라 하고, 나머지 외래 강사니 겸임 교수니 하는 사람들은 몽땅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나 같은 시간강사는 의문의 여지 없이 당연한 비정규직이다. 심지어 법을 따르자면 나는 교원도 아니다. 박정희 정권 때 개정된 고등교육법이 강사의 교원 지위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아는 학생들이 이따금씩 '강사님'이나 '선생님'으로 부른다.
보험도, 연구비도, 휴게실도 없다. 그리고 시간당 4만 원의 강의료를 받는다. 간혹 최고 대우를 받으면 5만5천 원이다. 많은 돈이라 생각하겠지만 마음대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군데 대학에서 모두 네 시간을 가르친다.
대략 한 달에 80만 원을 번다. 원래 세 군데에서 강의했는데 한 군데에서는 별안간 과목이 없어져서 해촉 당했다. 그나마 대학이 하나는 서울에 있고 다른 하나는 인천에 있어 버스값과 밥값을 빼면 눈물 나는 액수만 남는다. 그러니 굶어 죽지 않으려면 책 보따리 싸들고 더 많은 대학을 돌아야 한다.
나도 '학진'형 인간이 될까? 미국과 일본의 교수사회도 벽이 높지만 한국 수준은 아니다. 대한민국 시간강사에게 '고용 계약' 따위는 없으니 역시 '연줄'이 문제가 된다. 연줄을 총동원해야 간신히 강의를 구할 수 있다. 보따리로 연명하며 임용 기회만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 방학이 오면 눈앞이 캄캄하다. 강의가 없으니 수입도 없다. 책과 싸우며 다음 강의를 준비하는 고통의 기간이다. 마누라와 자식 걱정이 태산이다. 종강 무렵에 나는 또 조교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전화 한 통으로 이루어지는 구두계약이 다음 학기 강의 여부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