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재를 위한 자본주의

진보의 법벌이 문제

등록 2009.06.14 09:29수정 2009.06.1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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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지식인들도, 88만원세대라는 냉혹한 사회환경 속에서 혁명적인 사고에 젖어버릴 수 밖에 없는논객들도, 밥벌이라는 기본적인 생활 앞에서는 무기력해지기 일쑤다. 진보적인 그들이 억만금의 돈을 원하는 것이라고는(생긴다면 받을 사람도 많겠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쓰는 일만으로 먹고 사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천민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다.

출판시장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펼쳐지지만, 그 시장의 규모와는 별개로 지식인들의 연구서나 조금이라도 어려운 책들은 그 책을 뒷받침하는 권위와 이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가들의 밥벌이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중고등학생용 개론서와 <~이야기> 류의 책들을, 논객들은 그나마 잘 팔리는 외국의 책을 번역하거나 섹시한 제목으로 저급한 책들을 찍어내기에 바쁘다. 대한민국은 글쟁이들에게 행복한 국가가 아니다.

지식인과 논객에게 가장 안정적인 직장은 대학이다. 하지만 대학의 문은 좁고, 그 많은 대학들이 원하는 교수들은 실력보다는 간판, 이론보다는 실용에 능한 이들이다. 대학의 교수등용 시스템이 이미 썩어빠져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철밥통 교수들은 더이상 학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학엔 더 이상 학문을 평가할 만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학연과 지적족벌체계로 얼룩진 대학은 개혁의 대상이자 지식인과 논객의 영원한 이상향이라는 딜레마적 존재로 남는다.

자유경쟁과 국가라는 이분법적 틀

자유경쟁이라는 화두가 중시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의심받고 있다. 완벽한 자유경쟁 체제에서는 실력 혹은 좋은 제품이 선택될 것이라는 신화는 이미 깨어진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은 그 신화가 깨진 이유가 완전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의 저자 히스 교수는 이를 '황제 다이어트'의 예로 비판한다. 99%의 황제다이어트는 의미가 없다. 99%의 다이어트가 99%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상식적인데도 불구하고, 99%의 황제다이어트는 되려 부정적 효과로 돌아온다.

나카타디 이와오처럼 '자유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건 최근 경제위기 이후 출판되는 마르크스 경제학파의 저술과 케인즈주의 경제학파의 저술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자본주의 위기론의 일면이다. 자유경쟁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좌파들을이상주의자, 현실적 대안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는 우파들이, 자유경쟁이라는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자유경쟁의 운용은 공정한 평가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수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회 어느 부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평가제도를 결여한 채 자유경쟁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려는 태도는 결국 금융위기를 불러온 현재의 사태를 반복할 뿐이다. 자유경쟁의 도덕성은 견제와 균형으로부터 나온다.


황진태의 고민: 밥벌이

새사연처럼 건강해 보이는 연구소에서조차 객원연구원이라는 신분은 돈 한푼 받지 못하는 백수에 불과하다. 황진태의 고민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시대 지식인들과 논객들이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딜레마다.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해야만 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물 속에서 숨가쁘게 발을 놀리는 백조의 우아함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은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자신들의 밥벌이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못한다. 굶고 고통 받고 구속 당하는 것만이 상장이 되고 훈장이 되는 진보적 지식인들은 밥벌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밥벌이를 고민해야 하고 또 그 밥벌이와 관련된 문제를 언제나 비판하면서도 스스로의 입은 구제하지 못하는 처참함 속에 놓여 있다.


우파들의 사정은 이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권력과 기업에 친화적인 그들은 자본의 지원에 노출되기 쉽다. 수많은 우파 지식인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소를 차리고, 어딘가로부터 자본을 지원받는다. 굶고 병들고 출세에 눈이 멀어 자신의 이념을 내팽개친 진보적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결국 자본이 풍부한 보수진영으로 흘러들어간다. 나는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이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황진태가 말했듯이, 변희재의 발빠른 행보는 출세욕에 눈 먼 변태적 지식인의 행보라기보다는, 먹고 사는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불쌍한 우리네 진보적 지식인들의 한 예일 뿐이다.

변희재의 몸부림엔 이유가 있다. 변희재가 대학이라는 안정적 직장에 속해 있는 진중권에게 끊임 없는 질투와 변태적 스토커 짓을 벌이는 것은, 변희재의 학사 학위로는 마땅한 안정적 직장을 찾기 어렵다는 현실적 고민에 있는 것이다. 변희재에게 열린 자본은 그가 택했던 최초의 정치적 입장의 반대쪽에 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황진태에게 대운하를 추진하는 용역연구가 제안되는 것처럼, 변희재 정도의 논객을 입맛 다시며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자본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게 있다. 그것이 대한민국 지식인과 논객들의 현실적 딜레마다. 굶느냐 변절하느냐의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반복재생산될 것이다.


'비영리재단'이라는 제3섹터의 자본

과학계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정부에 종속된 과학은 정부의 자본에 종속된다. 자본의 편중이 지식인들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부 주도의 과학정책은 과학의 다양성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력은 정부가 가진 정책적 스탠스 내에서만 판단될 뿐, 정부가 지닌 과학정책이 옳다는 것을 보장해 줄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다양한 시도들을 좌절시킨다. 문제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이 투입되는 방식이다. 자본의 출처가 독점적일 때에는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밥벌이 문제도, 기초과학 및 기초학문의 문제도 모두 한가지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자본의 편중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가장 큰 자본인 정부와 기업은 한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린다. 그것을 분산시키지 못하는 한, 언제나 굶어 죽는 지식인, 황우석과 같은 과학자, 별볼일 없는 대학과 빈약한 학문적 유산이 반복될 뿐이다.


2005년 김석현이 발표한 보고서 <새로운 과학기술 투자주체 비영리민간재단>은 과학기술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해야만 하는 주장을 다루고 있다. 분자생물학의 태동에 있어 록펠러 재단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록펠러 재단의 자본이 가진 비윤리적인 면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학계는 비영리재단에 의해 돌아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비영리재단의 장학금과 자본에 의해 그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비영리재단은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제3섹터로 불린다.

시민단체들이급성장했지만 그들이 여전히 개인기부와 정부의 지원에 의해 운영된다면 그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정부에 기대는 것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것도 결국 자유경쟁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영리재단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본을 전략적으로 우회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다.

비영리재단의 혜택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과학기술계다. 하지만 내가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이 점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 비영리재단에 대한 정부의 규제완화와 다양한지원정책이 황진태의 고민에 대한 한가지 답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장학제도에 치중되어 있는 비영리재단의 운용폭을 과감히 넓히고, 이처럼 비영리재단을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 과감한 세재혜택 및 지원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부는 해야할 일의 상당부분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대학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도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활동할 수 있는, 변희재와 같이 이념을 쳇바퀴 돌듯 바꾸는 지식인들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다가오게 될지 모른다.

착한 자본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자본의 속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다양성을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보가 선택해야 하는 하나의 전략적 대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2009.06.14 09:29ⓒ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변희재 #진보 #시간강사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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