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 대표들과 대전지역 국회의원들은 지난해 1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 해체는 과학기술의 후퇴와 국가경쟁력 저하를 가져올 것"이라며 "인수위는 즉각 이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오마이뉴스 장재완
최첨단 시대에 박정희 시대의 철학을 가진 정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여전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시대의 과학기술 발전은 평가가 분분하지만, 그는 과학기술의 양적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KIST의 설립과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으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계는 그 뼈대를 갖출 수 있었다. 경제발전의 논리에 매몰되어 기초과학이 경시되고 따라서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노벨상을 요원한 일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미 과학계가 미국의 주도로 거대과학 중심으로 흘러가던 시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룬 성과는 무시할 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적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이유는, 질적 혁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논문 수는 2007년 기준으로 세계 12위를 기록했지만 질적 수준의 잣대인 논문 1건 당 피인용 건수는 세계 30위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과학기술의 발전 정도를 놓고 노벨상을 지표로 삼는 행태도 우스운 것이지만, 해외의 유수한 석학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미흡한 점, 장기적인 정책적 고려가 없는 점을 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인들을 뒷전으로 내팽개쳐두고,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심지어 과학기술인의 처우의 열악함을 본 고등학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과, 박사급 고급인력 절반의 백수화, 고급 인력의 해외유출을 경험하면서도 뚜렷한 성장을 이루었다. 과학기술인에 대한 푸대접이 이토록 심한 국가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장기적/철학적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서, 한국 과학기술계가 이룬 성장은 오로지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인고와 피와 땀이 이룬 결과다.
그러나 헝그리 정신으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분명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계는 뚜렷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창의적인 연구로세계를 이끄는 연구자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고, 근근히 외국의 선도적 연구들을 뒤따라가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시스템을 정비하지않으면 이마저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과학에 있어 기초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수학이 무시당하고, 수학전공자들이 모조리 경제학이나 경영학으로 전공을 옮기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설학원과 구분되지도 않는 열악한 수준의 수리과학연구소를 보고 어느 누가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돋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인가('맹모삼천지교 필요한 수학계' 매일경제 2009/05/13, '국내 유일의 국책 수리과학 전문 연구기관 수리연의 홀대' 중도일보 2009/06/17).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헝그리 정신으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미련이 보여주는 것
비록 황우석 박사에게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이상희 전 과기처 장관이지만, 그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애정마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 3월, 40년간 이룬 과학기술행정이 1년간 무너진 듯한 느낌이라며 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40년 과학기술 행정, 지난 1년간 무너진 느낌' 중앙일보 3월 13일).
과기부를 교과부로 통폐합하는 것도 모자라, 헌법에 보장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또 여기서 처음으로 발표했다는 9개 의제 중 단 2개만이 과학기술정책과 관련된 주제였다는 것은 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 지닌 중심점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정부출연연구소(이후 출연연)의 절반은 지식경제부에, 절반은 교육과학부에 소속시킴으로써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비록 과학기술계의 강력한 반발로 무마되기는 했지만, 지난 한 해 과학기술계는 출연연의 통폐합이라는 구조조정을 앞두고 패닉상태를 겪어야만 했다.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 은반의 여왕 김연아, 마린보이 박태환과 맨유의 박지성은 언제나 뉴스지면에 오르내리지만, 과학기술계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이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다. 한예종 사태는 영향력 있는 시사프로그램인 '피디수첩'을 타고 즉각 방송되었지만, 출연연의 통폐합을 앞두고 과학기술계가 전국민적 호소문을 돌리고 있을 때 피디수첩은 그들의 눈물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방송을 편성하는 것은 피디의 재량에 달린 일이지만, 이는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예술과 스포츠에 대한 관심의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다. 출연연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제나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을 반복해 왔다. 과학기술계에 '또 우리가 먼저 당하는구나'라는 자조가 흘러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록 사상 유례가 없었을 정도로 강력한 과학기술계의 반발에 출연연 통폐합에 대한 논의는 미루어졌지만, 과학기술자들은 언제고 조용히 자신들의 목을 죄어 오는 정부의 칼날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이공계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인은 대접받는 직종이 아니다. 과학기술 교육의 산실이라는 포항공대의 2008년 수석 졸업자는 의대로 편입학했고, 서울대 자퇴생 중 공대, 자연대생의 비율은 2003년 이후 전체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다. 자퇴생의 대부분은 의학이나 인문 계열로 방향을 바꿨으며, 이공계 대학생 입학 정원은 점점 줄고 의약계 대학 입학 정원은 늘었다.
모두가 어려운 마당에 과학기술계의 어려움만 강조한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과학기술인들이 국가에 공헌한 만큼 대접받아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식상한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계적 예술가를 원하는 만큼만 세계적 과학자를원해달라는 바람은 무리인가. 김연아 선수를 사랑해주는 만큼만 김빛내리 교수를 사랑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무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과학에 대한 기대감이 숨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기대감인지, 뛰어난 세계적인 과학기술자를 가져보지 못한 국민의 열등감의 발로인지 알 수 없지만, 황우석 박사에 대한 국민의 열정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는 그열망을 반영했던 증거라고 생각한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이 있은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이들의 사랑은 놀랍고 또 신비하기까지 하다.
'황빠'라는 현상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과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과학기술계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세계적인 과학기술자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 사례다. 광우병 사태에서 한국인들의 과학적인 태도를 무시한 버시바우 전 대사에게 향했던 국민들의 분노가 이 모든 현상을 대변한다. 우리에겐 세계적인 과학자가 없다. 국민들은 그러한 과학자를 원하지만,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번째로 말한다. 헝그리 정신으로는 부족하다.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지위
한국 과학기술자 사회를 분석한 2002년 보고서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자 사회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제시한다(송성수, 과학기술학연구, 2002).
첫째, 한국의 과학기술자 사회는 주로 외형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성장해 왔고, 그 결과 연구의 질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둘째, 한국에서는 과학기술활동의 기본이 되는 기초연구가 경시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과학자 집단과 기술자 집단의 상호작용이 미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 그 결과 산학연 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구에서는 대학, 기업연구소, 공공연구소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연구개발주체로 정립되기 시작했고 따라서 동등한 자격과 독자적인 위상을 가진 주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가 편중되었고 그 결과 고급인력들은 모두 대학으로 귀착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게다가 그나마 만들어진 출연연에 대한 홀대는 고급인력의 해외유출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넷째,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자 리더 그룹의 형성이 거의 전무하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과학기술자 리더그룹이 형성되어 정부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고, 중국과 프랑스는 엘리트 양성에 초점을 둔 교육제도로 과학기술자가 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그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전두환 시대를 거치며 그러한 활동은 축소되거나 사라져 버렸다.
특히 과학기술자의 국가정책 참여도를 반영하는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에 과학기술자가 참여하는 비중에서 한국은 1999년을 기준으로 5.0%로, 중국의 34.1%, 러시아의 32.0%, 프랑스의 19.8%, 일본의 10.4%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이러한 특징은 결국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위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과학기술자는 중요성에 비해 대우가 부족하고, 사회적 주체로 나서지 못한 채 주로 기능적 활동만을 수행해 왔으며, 이에 따라 사회문화활동에 대한 참여가 저조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정계로 진출하고, 법대 상경계열의 인사들이 국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기술자들의 권익은 그저 찬밥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과학은 없다'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예종 사태를 비롯한 정부 정책의 철학적 부재의 핵심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지한 의견수렴과정 없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으로 모든 사안을 추진한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정부가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밀실행정으로 처리되는 이명박 정부의 독단은 예술을 죽이고 과학을 죽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3년 반이 지나면 떠나겠지만, 이 나라 국민들은 앞으로 50년, 100년동안 예술과 문화와 과학을 향유하고 싶어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재산 300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말만 하고 점점 그 실행을 뒤로 미루고 있는데, 그 재산 록펠러 재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명박 재단이라는 이름으로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아마 현재와 같이 국민의 질타를 받는 마당에 이명박 대통령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한 줄 남길 계략이 아닐까 싶다.
'피디수첩'은 한예종 사태에 대한 보고를 "돈은 주고 운영은 자율에 맡기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한예종이 그래야 한다면 정부의 돈이 투자된 정부출연연도 그래야 한다. 문화의 우수함도 좋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과학에 목말라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본다. 황우석 박사 지지자들은 슬퍼한다. 그들을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대로 된 투자로 황우석 박사를 넘어서는 세계적 과학자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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