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을 누른 뒤 몇 분 안 되어 출동한 미국 경찰. 우리집 현관 모퉁이에서 플래시 없이 찍었다.
한나영
"X 팔려."
함께 사는 '동거녀1'의 싸늘한 한 마디가 귓전을 때렸다.
"너만 X 팔리니? 나도 그래. 난들 이러고 싶었냐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가시 돋친 말이 무슨 득이 된다고.""득 되라고 한 것 아니야."말대꾸까지 하며 뻣뻣하게 나오는 동거녀1이었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문제는 이미 발생한 건데. 그런 말 한다고 이 상황이 바뀔 것도 아니고."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어떡하니"만 연발하며 정신 없이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거기 보안경비 회사 전화번호 있잖아. 전화 좀 해 볼래? 아님 911이라도 부르던가.""엄마가 해. 잘못한 사람이 해야지."'쌀쌀맞은 ㄴ!'누구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는데 동거녀1의 반응은 정말 쌀쌀맞았다. 아니 쌀쌀맞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주방에서 난 냄새, 화를 부르다냄새가 진동했다. 방에 있다가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단거리 선수 속도로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아악, 이게 무슨 일이지?
이미 늦었다. 오븐 위로 보이는 빨간 불꽃이 냄비를 그을리고 있었다. 냄새는 고약했고 연기는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강에 좋은 '엄마표 도시락'을 먹인다고 도시락을 준비한 게 화근이었다. 저녁을 잘 먹고 다음 날 챙겨갈 아이들의 샌드위치 도시락을 싼다고 오븐 위에 감자를 올려놓았는데 이런 정신머리라고는, 그만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었다.
냄비 안에서 잘 익어가던 감자는 쫄아들었고 이내 석탄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까운 냄비 하나 바싹 태워 없애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주방의 환풍기를 돌리거나 집안에 있는 창문 다 열어제쳐 환기를 시키면 끝나는 '일반'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벌여놓은 상황은 예사롭지 않은 '특별' 상황이었다. 그냥 특별한 게 아니라 심각한,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였다.
"삐이~ 삐이~"갑자기 주방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능 좋은 '미제' 경보기에서 터져 나오는 경보음이었다. 그 소리는 초메가톤급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큰 경보음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쩌면 조용한 밤, 한적한 주택가에서 울리는 경보음이어서 더 크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끔찍한 소리는 나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악, 무슨 소리가 저렇게 크다냐!'
웬수같이 터져나오는 경보기의 울음이었다. 그 소리는 대단히 규칙적이고 목청껏 외쳐대는 고함이었다. 키 크고 덩치 좋은 미식 축구선수가 운동장에서 포효하듯 외치는 괴성이었다. 더구나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그 소리는 가히 위협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험상궂은 표정의 동거녀1이 "X 팔린다"고 했던 말도 사실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 나도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 근처 주택가는 실버타운이라 불릴 만큼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초저녁부터 적막공산을 이루는 아주 조용한 동네였다. 그런데 바로 그 '소음제로'인 청정 타운을 우리 집 깡패(?) 경보기가 완전히 들쑤셔놓고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원인 제공을 한 '불량 주부' 내가 있었지만 말이다.
함께 사는 다른 '동거녀2'도 이런 사태를 야기시킨 엄마가 원망스러운 듯 "지금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 내다보고 있어"라고 점잖게 한마디 거들었다.
'아, 그래. 나도 안다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굴욕적인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내가 그걸 모르겠냐고?'
죽지 않는 경보음 때문에 결국 911을 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