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비 내리는 날 옛날식 다방에 앉아...

[30년 부평지킴이] 산곡시장 옛 백마극장 옆 '봉다방'

등록 2009.06.30 09:39수정 2009.06.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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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미군 군복 세탁해 마련한 돈으로 가게 시작


a 봉다방 옛 5공수여단 방면에서 봉다방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했던 골목길.

봉다방 옛 5공수여단 방면에서 봉다방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했던 골목길. ⓒ 김갑봉

극장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며 대부분 커피숍은 영화관 내부에 들어서있다. 세월이 흘러 다방이 커피숍으로 변모했을 뿐 예나 지금이나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로 주변 커피숍은 늘 북적인다.

산곡동 주민들에게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백마극장은 사라지고 없지만, 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리며 커피 한잔을 시켜놓곤 했던 '봉다방'은 세월을 간직한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처럼 많은 이들이 다방을 찾지는 않지만 궂은비 내리는 날이면 나이 50을 넘긴 아저씨들이 어김없이 저마다 추억을 간직한 채 다방을 찾는다. 첫 사랑 그 소녀를 떠올리기도 하고, 계란이 들어간 모닝커피를 내주던 마담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리운 옛 친구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러면 다방주인은 그들에게 추억과 함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놓는다.

봉다방은 35년 전 이름 그대로 간판을 달고 있다. 그리고 다방주인 최정숙(74) 할머니도 그대로 봉다방을 지키고 있다. 1974년에 문을 연 봉다방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다방이다. 부평에서 유명하다는 '영아다방'보다 더 오래됐다.

최 할머니는 "만날 봉(逢)자를 써서 봉다방이라고 했다. 가겔 내려고 작명소를 갔더니 '소봉'이라고 지어 주기에 마음에 안 들더라고. 그래서 알아보니 인천 어디에도 '봉다방'은 없기에 내가 그리 지었다"며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고 추억을 찾는 이들이 있어서 문을 열고 있다. 그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누님 지금도 계시네요. 반갑고 고마우니 제발 문 닫지 마세요'라고 하거든, 그래서 있는거야"라고 말했다.


오산서 태어난 최 할머니는 군 장교였던 남편을 따라 포항을 거쳐 부평으로 오게 됐다. 다방을 내기 전 최 할머니 부부는 15년 동안 세탁소를 했다.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 부평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그 외로는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와 연관된 사업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부평시장(현 부평자유시장)의 경우도 미군기지에서 나온 품목을 취급해 한 때 '양키시장'이라 불렸다.

최 할머니는 미군들의 군복을 세탁해 이를 납품하고 월별로 돈을 받았다. 그는 "아파트로 변한 곳이 전에는 다 미군기지였는데 한양아파트(미군기지→5공수부대→한양아파트) 노랑다리길 근처였다"며 "상수도도 시원찮을 때니까 미군기지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1차로 빨고 샘물 길어다 헹군 뒤 집에 가져와 말리고 다려서 납품했다. 그렇게 15년을 하고 나니 집도 장만하게 됐고 가게를 얻게 됐다"고 전했다.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

a 최정숙 할머니 노래방 등장과 휴대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봉다방 역시 93~4년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지금은 최 할머니 혼자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최정숙 할머니 노래방 등장과 휴대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봉다방 역시 93~4년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지금은 최 할머니 혼자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 김갑봉


만남의 장소였던 '봉다방'. 봉다방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은 이 일대 군인이었다. 5공수부대가 있었던 당시 휴가 나왔거나 외출을 나온 군인들로 다방은 늘 북적였다. 마찬가지로 군에 있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가씨들도 제법 많았다. 전화가 발달하지 않은 때라 약속은 편지로 할 수밖에 없어 그리움이 더 클 때였다.

이를 두고 최 할머니는 "편지에 '몇월 며칠에 당신을 만나로 가요'라고 적어 보내면 약속한 시간에 맞춰 외출을 나온 군인이 먼저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때론 먼저 도착한 아가씨가 군에 전화해서 '봉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전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리운 애인을 기다리는 이들보단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과 마담을 보기 위해 다방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 보려 하고,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하는 이들로 다방 안은 늘 시끄러웠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방에서는 군인들과 이 동네 건달(?)들 간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졌고, 때론 몸싸움이 일곤 했다.

최 할머니는 당시 서른아홉에 동네에 가게를 낸 터라 이들의 신경전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래서 다방 안에서 아가씨들에게 거는 허튼 수작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는 "군사정부 시절이니 경찰에 신고해 봤자였다. 군인이 위에 있다는 걸 안 뒤에는 경찰에 신고한 적이 없었다"며 "그래도 동네 녀석들이 고마웠다. 조폭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그래도 동네 어깨라면서, 뭔가 트집 잡으려거나, 아가씨들 괴롭히면 도와줬다. 그 때 어깨들이 이젠 나이 쉰을 넘긴 동네 아저씨들이 돼 비가 오면 추억을 찾아 가게에 들러 '누님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한다"고 전했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모한 곳이 전에는 다들 방직공장과 식품공장, 기계공장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봉다방이 위치한 산곡시장은 퇴근길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들로 붐볐고, 산곡초등학교 앞길은 '산곡동의 맨해튼 거리'라 불릴 정도로 번화가를 자랑했다.

군인 말고도 퇴근길 다방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다방이라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만은 않아 최 할머니는 신경 쓸 일이 그만큼 많았다. 게다가 동네서 장사하는 터라 신중해야 했다.

최 할머니는 "아내들은 남편의 월급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호기부린다고 막 쓰면 큰일 나게 돼있다. 그래서 꼭 집에 가서 아내한테 돈 맡겨놓고 쓸 만큼만 가지고 다니라고 충고했다. 결혼 안 한 총각한테도 돈을 모아두어야 아가씨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그러니 유흥으로 탕진하면 못 쓴다고 일러주곤 했는데 그 총각들이 이젠 찾아와 고마워 한다"고 말했다.

"내쫓아도 안 나가더니, 이젠 앉았다 가라 해도 안 온다"

a 백마극장 산곡동 맨해튼 거리에서 산곡시장 입구로  들어오는 골목길. 사진 왼쪽  벽화가 그려진 건물이 한 때는 번성했던 백마극장이다. 여기서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다방이 있다.

백마극장 산곡동 맨해튼 거리에서 산곡시장 입구로 들어오는 골목길. 사진 왼쪽 벽화가 그려진 건물이 한 때는 번성했던 백마극장이다. 여기서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다방이 있다. ⓒ 김갑봉


봉다방은 한때 최 할머니를 포함해 마담 1명과 아가씨 2명 그리고 카운터 1명과 주방장 1명 그렇게 6명이 일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최 할머니 혼자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이제는 차를 팔기 위해서라기보단 손 때 묻은 그리움과 추억을 전하기 위해서 가게 문을 연다.

재밌는 점은 어느 다방이든 당시 주방장 대부분은 남자였다는 게다. 커피를 타고 음식을 만들 때도 있지만 궂은일이 다방에도 제법 되기 때문에 주방장은 남자를 고용했단다. 이를테면 연탄과 갈탄을 이용한 보일러가 많을 때라 홀 온도를 맞추는 일 등을 남자가 맡았던 것. 같이 일했던 이들이 지금도 최 할머니가 가게 운영한다는 것을 알고 각종 건강식품을 보내주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고 있다.

최 할머니는 "다방에 오는 이들이 아가씨와 말 한번 해보려고, 어떻게 수작 한번 걸려고 오진 않았겠냐? 걔 중에는 결혼한 이들도 있는데 사람에게 정 가는 마음은 누가 뭐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좋아 죽겠다는 걸 어쩌겠어? 그저 내가 결혼하고 아이 키우며 사니 조언도 해주고 그랬다"며 "전에는 내쫓아도 안 나가던 때였는데 지금은 앉았다 가라고 해도 안 오는 때가 됐다"고 웃음을 지었다.

다방이 쇠퇴한 데는 노래방의 번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보통신의 발달이 더 크다. 삐삐(호출기)가 있던 때만 해도 다방은 늘 만남의 장소였다. 휴대폰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편지로 전화로 혹은 삐삐로 '봉다방에서 기다릴게요'라는 말을 남겨 놓고 다방에 전화라도 울리면 '내 님의 전화일까', 다방 문이 열리면 '내님 오실까'하면서 엽차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곤 했던 추억은 이젠 사라지고 없다.

그때 멋 부리던 이들의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

a 산곡시장 봉다방 입구 산곡시장. 군부대가 떠나고 공장이 떠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으니 전보다 더 붐벼야 할 시장이지만 휑하기만 하다. 유통시장 개방 이후 대형마트는 급성장한 반면 재래시장은 물론 동네 상점가는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다.

산곡시장 봉다방 입구 산곡시장. 군부대가 떠나고 공장이 떠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으니 전보다 더 붐벼야 할 시장이지만 휑하기만 하다. 유통시장 개방 이후 대형마트는 급성장한 반면 재래시장은 물론 동네 상점가는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다. ⓒ 김갑봉


그 시절 기억들은 이젠 추억으로만 남았고, 아저씨들은 비가 오면 그 추억을 찾아 다방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즐겨 마셨던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에 잠시 몸을 맡긴다.

봉다방을 찾는 이들이 즐겨 마시던 차는 단연 커피였다. 그중에서도 아메리칸 스타일을 선호했다고 한다. 최 할머니는 "조금 멋 좀 부리고 우쭐되는 이들은 꼭 미국산을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미국산이 더 구수했던 것 같기도 하다"며 "미국산을 사람들이 찾으니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품을 취급했던 상인들로부터 커피를 구했다. 지금 '아메리칸 스타일'이러면 웃지 않을 수 없지만 그들에게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는 하나의 멋이었다"고 말했다.

봉다방을 당분간 볼 수 있겠지만 몇 년을 더 볼 수 있을까? 봉다방이 있는 이 일대가 도시환경정비사업 구역으로 지정돼 개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다는 최 할머니는 찾아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문을 열겠다고 했다.

최 할머니는 "예쁜 누나들을 힐끗 쳐다보며 호기심에 나도 크면 저길(봉다방) 가봐야지 했던 사춘기 녀석들이 이젠 자기애들을 데리고 와 잠시 머물다 간다. 그리고 그 때 어깨들이 타지에 살면서도 내가 지금도 있다는 걸 알고 종종 찾아와 자기 친구들 안부를 묻는다. 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게 고맙듯이 나 역시 그들에게 추억을 전해주는 게 사는 도리인 듯하다"며 "비오는 날 계란 프라이 반숙과 함께 모닝 커피(커피 안에 계란 노른자만 들어간 커피. 영양을 생각해 그리 마셨다고 최 할머니는 전했다)를 한 잔씩 돌렸던 이들이 그립다. 그 때도 커피를 돌렸던 이들은 돈 많은 치들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없는 이들이었는데 그들이 세상 사는 재미를 더 알았던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봉다방 #30년 부평지킴이 #산곡동 #산곡시장 #백마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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