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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때와 장소가 잘 맞아야 한다. 때와 장소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제자리를 찾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이 글은 한 언론인이 기획한 책의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출간은 무산되었고, 원고는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이 글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썼으나 띄우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다. 이 편지를 보낼 기회를 또 잃었다고 생각하니 이 글을 꼭 띄우고 싶은 오기 비슷한 것이 생겼다. 그래서 결국 이 곳에 글을 올린다. 어쩌면 이 편지를 띄울 자리가 이곳이어서 결국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고백 : 띄우지 못한 편지
"가장 늦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만큼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너무 늦은 글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위해, 생전의 노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띄우지 못한 한 통의 편지'였다.
나는 노 대통령의 서거 열흘 전쯤 한 통의 편지를 썼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5월 29일자 <부산일보>에 실린 추도사 "친구 노무현을 보내며"에 언급되어 있다). 당시의 참담했을 노 대통령의 심정에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는 당신을 믿고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깊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심정'이 컸다. 고민 끝에 편지를 쓰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끝내 쓰지 못했다. 고심 끝에 그 말은 머지않아 직접 만나 손을 맞잡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편지도 띄우지 못한 채 그의 서거 소식을 듣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나의 결벽 탓이다.
당시는 노 대통령이 검찰의 조사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것이 그에게 득이 될까도 여러 날 고민했고, 쓴다면 공개적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에 어디에다 어떤 방식으로 띄울까도 생각이 많았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고, 편지를 받을 노 대통령은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와 노 대통령이 단순히 같은 당 국회의원이란 정치적 관계를 넘어 동지적 연을 맺은 것은 1990년 <3당 합당> 때,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 총재와 함께 하길 거부하고 민주당 잔류를 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국회의원 한 번 더 하자고 그동안 내가 견지해 온 정치적 신념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YS를 따라갈 때 노 대통령과 나는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따랐다. 우리는 서로 상의하지 않았지만, 늘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소위 꼬마 민주당을 창당할 때나, 평화민주당과 야권 통합을 이루어낼 때나, 그리고 의원직을 사퇴할 때도 늘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가장 어려울 때 늘 함께 하는 정치적 동지였고 친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념이 강한 만큼이나 인간적인 정도 두터운 사람이었다.
다짐도 하고 각오도 했지만 정치적 보스와 거대 여당을 등진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3당합당 반대 이후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둡고 긴 겨울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가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밝힌 것처럼, 주위에 재야 변호사들과 학생 운동권 출신들, 노동운동가들이 울타리로 버티고 있었고, 변호사 사무실을 낼 수도 있었던 그는 상대적으로 지원군도 없고 별다른 먹고 살 재주도 없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나는 국회의원에 떨어져도 변호사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지만 당신은 뭘 믿고 안 따라갔소?"
이 말은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애정 표현이었다.
만일 그때 그가 흔들렸다면 나는 어땠을까? 끝까지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설사 그럴 수 있었다 하더라도 더 강한 유혹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더 많은 좌절을 겪고 피폐해졌을 것이다.
그 이후 선거에서도 그와 나는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부산을 늘 고집했고 그 때문에 연거푸 떨어졌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허탈한 마음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술과 노래로 풀었다. 선거에서 지고 둘 다 빈손이 된 후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였고, 노래방을 돌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그리움이 물결치며 오늘도 못 잊어 네 이름 부르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노 대통령 서거 후 그의 애창곡으로 '아침 이슬'이나 '사랑으로'가 많이 알려졌지만, 노무현의 인생 역정에서 '부산 갈매기'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곡이고, 아마도 그 어떤 노래보다도 사무친 심정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 광복동에서 선거 운동 중에 다시 한번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의 기막힌 사연은 1992년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서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이기택 총재가 이끄는 민주계의 2인자였고, 1992년 대선 때도 늘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함께 전국으로 지원연설을 다닌 덕에 민주당 내에서 어느 정도 지지도가 있었다. 그래서 언론이나 주변에선 다들 내가 무난히 최고위원이 될 거라 내다봤다. 나 역시 어느 정도 믿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가 약한 노무현 의원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어찌 보면 내 선거운동이 아니라 노 의원 선거운동원이라고 할 만큼 빼놓지 않고 노무현에게 한 표를 부탁했다. "노무현에게 우선 한 표 찍어주고 그래도 남는 표가 있으면 이 김정길이도 한 표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 김정길은 보기 좋게 떨어지고 노무현은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내가 그를 부탁하고 다니는 사이 그는 전국을 돌며 특히 호남지역을 집중 공략하여 맨투맨으로 대의원들을 만나서 표밭을 다졌고, 대의원들은 발로 뛰는 그의 성실함과 진솔함에 감동을 받아 흔쾌히 표를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떨어져버리자 노 의원도 당혹스러워했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 나나 '김정길은 될 것'이라는 확신 하에 '노무현 최고위원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는 되고 나는 떨어졌으니 난감할 수밖에.
그는 나중에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어찌 보면 김 의원의 낙선에 힘입어 내가 당선된 셈"이라고 토로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애정을 가진 동료 의원을 돕고자 하는 선의는 있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자만했던 것이고, 그는 불리한 판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실하게 발로 뛰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 후보 선거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을 살려, 세의 불리함이나 지역적 여건 같은 것을 따져 지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는 선거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현란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행동으로 희망을 일구어 가는 진짜 정치인이라는 걸 알아봤던 것이다.
함께 겪은 정치 역정과 생활의 어려움들이 있었으므로 이런저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노 대통령의 '밀가루 알러지'와 우리 집사람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겠다.
권양숙씨와 우리 집사람은 고집불통인 남편들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동병상련의 정으로 절친하게 지냈다. 고집불통에 집안 살림이라곤 도무지 돌보지 않는 벽창호 남편을 둔 덕에 궁핍한 살림을 책임져야 했으니 두 사람 사이가 남달리 잘 통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노무현 의원이 초선이고 내가 재선 의원이던 시절, 그래도 국회의원 한 번 더 했다고 서울 지리는 우리가 더 잘 알지 않겠느냐며 어느 날, 권양숙씨가 우리 집사람에게 한약을 지으러 가는 데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한의사에게 처방전만 받아서 경동시장 약재상에 직접 가서 지어 먹으면 싸게 보약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우리 집사람이 권 여사의 손을 이끌고 함께 약을 지으러 갔다.
한의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들고 약재시장에서 약을 지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는 밀가루 음식을 먹지 말라는 금기가 있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 평소의 식성대로 과감하게 금기 사항을 어겼고 그때부터 밀가루 알러지가 생기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건 돈을 아끼려 약재상에서 약을 짓자고 한 사람이 우리 집사람이었고, 처방전을 받은 한의원도 우리 집사람이 아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죄인 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간혹 함께 하는 식사 자리가 있을 때마다 밀가루 알러지가 화제에 올랐고, 우리 집사람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노 대통령이나 권양숙씨나 그저 지나간 궁핍한 시절의 흔적으로 여기고 웃어넘기지만 집사람은 지금까지도 민망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우리는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마침 그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 내외는 보통 현관에서 하는 배웅에서 한걸음 나아가 멀리 관저의 대문 앞까지 걸어 나와 우리 부부를 배웅해주는 등 각별한 예의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정치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는 사이는 더 이상 아니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서로의 길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위대한 시민 선거혁명을 통해 대통령이 된 노 대통령을 보좌할 사람들의 면면도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선거 때 같은 비전을 공유하면서 함께 고생을 한 사람들이고, 노 대통령과 함께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그런 시대에 내 자리는 참으로 어정쩡했다.
과거의 민주화 투쟁 경력이나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를 들먹이며 정치권에 어정거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치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나는 늘 선거에서 떨어진 후에는 공부를 하거나 정치권 밖의 일들을 해왔다. 정치적 동지였던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국민의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것이 도리이고, 또한 노 대통령의 당선에 처음부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 상태에서 노 대통령 주변에 남아 있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참여정부 시절 선출직이었던 대한체육회장에 출마하면서 나는 노 대통령의 의중을 한번 거스른 일이 있다. 노 대통령은 아마도 내가 대한체육회 회장 선거에 나가도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대한체육회장 출마를 반대했고, 나는 "국회의원 선거도 몇 번씩 떨어졌는데 체육회장 한 번 더 떨어지는 게 무슨 대수겠냐"며 출마를 강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도 더 이상 나의 출마를 말리지는 못했다. 내가 회장에 선출이 되자 사람들은 노 대통령의 힘이 작용했을 거라고 쉽게들 생각했지만 속내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근거 없는 오해와 구설에 시달렸고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들어서 타의에 의해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내 놓은 직후에, 나는 봉하마을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이제 서로 야인이 된 친구 사이로 위로를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좀 마음을 추스른 다음'으로 봉하 행을 미뤘다. 그때 때마침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초청을 받기도 했고 다른 여러 가지 사정도 있어서 그 길로 베이징으로 떠났었다.
사실 그때 내가 봉하마을에 가서 정말로 노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퇴직한 이후까지 내 마음을 항상 무겁게 짓눌러온 바위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 전에 나를 찾아와 간곡하게 말했다. "김 장관, 나 좀 도와주십시오. 김 장관만 도와주시면 제가 우리 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에 걸려 재판 중이었다. 돕고 싶어도 선거법 위반 때문에 마음껏 도울 수도 없는 처지였고 노무현 의원이 대통령 후보에 당선된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힘이 된다면 돕겠지만,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큰 힘이 되겠습니까?" 하면서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경선에 돌입한 직후에도 나는 노무현 후보의 경선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노무현 후보가 자신의 의지와, 노사모 등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광주경선에서 극적인 역전을 거두어 내었고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가 광주경선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1위로 역전한 것은,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가, 부산출신인 그가 광주에서 국민경선 1위로 올라선 것은 내게는 큰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그의 그런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오랜 동지인 그가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왜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가!
그것은 내가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 중이라 선거운동에 자유로운 입장이 아니기도 했지만, 아마도 내가 낡은 사고방식에 갇혀 그의 당선 가능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오히려 부산 출신인 그를 믿어준 것은 오랜 정치적 동지인 내가 아니라 광주 시민들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후, 나는 대통령 선거 거의 막바지에야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어려웠을 때, 그래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을 때 처음부터 나는 그를 도와야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를 적극적으로 돕지 못했다. 나는 이에 대해 꼭 사과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회한이라서 꼭 만나서 손을 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도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은 뺐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뒤늦은 후회와 함께 그때 띄우지 못한 편지를 지금 다시 보낸다.
노무현 대통령님께….
이 글을 쓰기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대고 있는 지금도 고민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도 난감하고 미묘한 시기에 내가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이 글을 보고 사람들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이야기들을 할까 등등의 생각들이 저를 여러 번 망설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난감하고 미묘한 시기이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져서 여러 가지 걱정을 뒤로하고 말문을 엽니다.
근 한 달 동안 각종 언론 매체에서 전하는, 노 대통령님 일가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참으로 비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뜻이 같은 정치적 동지로서의 심정이라기보다, 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어 나온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인간적인 친구로서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욕적인 기분과 침통함은 특히 언론에 권 여사의 이름이 거론될 때 더했습니다.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 아침, 권 여사께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집사람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지금 권 여사님의 심정이 어떠할까"라며 눈물을 흘렸을 때는, 나이 탓인지 저도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연일 마치 경쟁하듯이 노 대통령 일가에 대한 보도를 해대는 검찰과 언론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검찰과 언론이 국민들에게 주입식 일일학습을 시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직 그 진위가 밝혀지지도 않은 피의 사실을 검찰은 매일 브리핑하고, 언론은 이에 추측성 예견까지 곁들여 마치 그 의혹들이 이미 확인된 사실인 양 반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보도를 별다른 생각 없이 접하다보면 검찰이나 특정 언론들이 의도한 대로 판단하고 유도한 대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이렇게 조금씩 여론의 물길을 만들어 가다가 만일 민의에 역풍이 불어 역류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그들은 물고를 다른 데로 돌리고 또 다른 타협을 하게 되겠지요.
어느 시대, 어떤 사회나 죽은 권력에 칼을 휘둘려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현재 권력의 주구가 되려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공생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것이지요. 노 대통령께서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는 그런 낡은 공생의 사슬을 끊고 권력으로부터 사회의 각 조직들을 독립시키고자 했었지만 결국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낡고 노회한 칼날이 당신의 목을 겨누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또 어떤 사람이 권력을 쥔다 한들 국가기관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유한 독립성을 누리며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줄 마음을 먹겠습니까.
제가 지금 무조건 노 대통령님의 편을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이었던 비자발적이었던, 알고 있었던 일이든 몰랐던 일이든,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검찰에서 착실히 수사를 해서 결과를 발표하고 죄를 물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피의사실만 가지고 마치 확정된 사실인 양 떠들어대고, 어떤 한 가지 일을 빌미로 지난 정권 전체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그 정권 하에서 해온 일들까지 부정하려고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비열하고 치졸한 정치 공작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이 나라의 민주화와 사회 각 기관의 독립성이 왜 이렇게 순식간에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훼손되고 퇴행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절망스러운 마음 가운데서도 국민의 판단과 역사의 심판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아도 당대의 권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표적을 세우고 심판한 일들은 반드시 세월이 지나면 그 사건의 본질과, 사건화의 검은 의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때에 내려지는 국민과 역사의 심판이야 말로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로 남아 역사에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 대통령님께는 현재 그 어떤 정치인도 갖지 못한 절대 지지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는 흙 묻은 신발이라도 가슴에 품어 줄 듯하다가도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가장 먼저 싸늘하게 돌아서는 게 정치인에 대한 세상인심인데, 지극한 곤경에 처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불려나가는 그 순간에도, '노짱'의 진심과 진실을 믿으며 그 길을 몸과 마음으로 배웅하는 그 많은 지지자들을 보고 저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솔직하게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검찰청 앞에서, 봉하마을에서 배웅하고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 사람들이 그 정도라면 차마 나서지는 못하고 가슴 졸이며 응원했던 보이지 않는 지지자들은 그 얼마나 많겠습니까. 권력이 떠나면 사람도 떠나게 마련인데, 권력의 핍박을 받아도 여전한 믿음을 가지고 응원하는 지지자들을 가진 당신은 정말 행복한 정치인입니다. 아마 그들이 지지하는 것은 정치인 노무현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 곁에도 누구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열혈 팬이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중학교 3학년인 제 늦둥이놈입니다. 이 녀석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아빠 친구 노무현 아저씨의 팬이었습니다. 그래서 노 대통령께서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가진 우리 부부와의 첫 청와대 만찬 때 제 집사람이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되셨으니 열혈 팬인 우리 막내에게 뭐라고 한 마디 써주시면 아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고. 그랬더니 즉석에서 "기범아, 꿈이 힘이다"라고 써주셨지요. 그 글은 지금도 기범이의 책상 위에서 이 글을 처음 받았을 때와 다름없이 강력한 힘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디 기운을 잃지 말고 국민의 신뢰와 역사의 힘을 믿으십시오.
권양숙 여사에게도 저희 집사람과 함께 안부를 전합니다.
편지는 이렇게 맺었지만, 이제 내가 정말 그의 손을 맞잡고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한 그 말을 지금 고백한다.
"노 대통령,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한 그때, 선뜻 나서서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검찰과 언론의 온갖 모략과 모함 속에서 혼자 묵묵히 부엉이바위를 오르던 그때, 당신을 도와주지 못해서, 당신 곁에 함께하지 못해서 정말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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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필요로 한 그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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