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선녀가 되어 하늘나라로 갔단다"

쌍용차노조 간부 이모씨 눈물로 아내를 보내던 날

등록 2009.07.23 14:44수정 2009.07.2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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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새벽. 쌍용차노조 간부 이모씨의 아내 박모씨의 발인을 앞둔 장례식장. 아이들과의 약속대로라면 이날 이씨의 아내는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있어야 했다. 그 약속을 위해 아이들의 외삼촌은 휴가까지 앞당겼었다. ⓒ 안승권

22일 새벽. 쌍용차노조 간부 이모씨의 아내 박모씨의 발인을 앞둔 장례식장. 아이들과의 약속대로라면 이날 이씨의 아내는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있어야 했다. 그 약속을 위해 아이들의 외삼촌은 휴가까지 앞당겼었다. ⓒ 안승권

보통의 부모들이라면 아이가 태어나고 첫 돌이 될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르고 산다. 적어도 엄마에게는 그렇다. 잠 못 자고, 젖몸살을 앓고, 분유 타고, 기저귀 갈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게다가 도우미 아주머니를 쓸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라면 일상의 가사노동도 그대로 엄마의 몫이다. 이렇듯 엄마는 아이를 키우며 온 힘을 다 소진한다.

 

그래서 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다. 출산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 수면부족 등 곁에서 세심히 배려하지 않으면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 출산 이후 8개월 동안 그 모든 힘을 육아와 가사에 쏟는 것도 모자라, 남편 걱정, 집안 걱정으로 단 한 순간도 마음 편치 않았던 엄마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 곁엔 위로해줄 남편도 없었고, 의지해 오던 친정아버지, 시아버지도 모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참 예쁠 네 살배기 아들과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핏덩이를 남긴 채. 그녀는 짐은 대체 얼마나 무거웠던 것일까. 과연 가늠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발인이 있던 22일 새벽. 넋마저 빠져나간 듯 힘겨워보이던 남편 이씨에게 어려운 인터뷰를 요청, 그 내용과 쌍용차 사건일지를 근거로 그녀의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2008년 12월>

기다리던 둘째의 출산. 아들이다. 밤낮으로 아이만 쳐다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시간. 그런데 남편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아내는 겁내지 않았다. 첫 아이를 출산하던 2006년에도 회사의 파업은 있었다. 그때도 남편은 집에 못 들어오곤 했지만, 서로를 믿으며 버텨냈던 기억이 있다.

 

남편은 회사에서 노조간부 직책을 제의받았다. 산후조리 중인 아내가 걱정이 돼서 고사했다. 하지만 제의가 거듭되자 아내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아내는 남편 뜻을 존중해주었다. 아내는 그렇듯 이해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2009년 1월>

남편 회사의 상황이 심각하다. 대주주 상하이차가 경영권을 포기하며 결국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지난 달부터 급여가 며칠씩 지연되기 시작하더니 이번 달부터는 각종수당이 미지급되기 시작한다. 1월에 나오던 연월차 수당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지난 1년 동안 힘들어도 쉬지 않고 모아오던 소중한 시간인데, 그 시간의 대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2009년 2월>

갑작스레 아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까이에 살며 늘 곁에서 의지가 되어주시던 아버지의 죽음. 넉넉지 않던 집안의 장녀였던, 그래서 늘 어른스럽고 씩씩했던 아내에게도 충격은 컸다. 큰아이도 혼란스러운지 외할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아내는 아이의 방 천장에 형광별 하나를 붙여주며 이야기했다. 외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 별이 되셨다고.

 

결혼 7주년. 올해 남편은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전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잊지 않고 해왔지만, 올해는 외식 한 끼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2009년 3월>

통장잔고는 바닥을 향해간다. 아내는 다짐하고 다짐한다.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만 소비하자. 결국 아이의 백일도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남편은 사진이라도, 것도 아니면 케이크라도 하나 사자고 하지만, 아내는 그 만큼의 여유조차 없었다. 회사사정은 여전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고, 남편의 집에 들어오는 횟수도 줄기 시작한다.

 

<2009년 4월>

회사에서 2500명이 넘는 인력을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내 남편은 무사할까? 이상하다. 심장이 계속 떨린다. 심장이 떨리고, 불안한 증세가 계속된다. 결국 아내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조심스레 정신과 치료를 권유한다. 초기 우울증 진단이 나왔다. 그래도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열심히 치료를 받고 빠르게 좋아졌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두 달 만에 또 상을 치렀다. 이토록 악재가 계속될 수 있을까? 아이의 방 천장엔 별 하나가 늘었다.

 

<2009년 5월>

남편이 점거 총파업 돌입했다. 회사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남편은 이제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친정엄마가 함께 있지만, 아내에게 남편이 없는 밤은 참 두렵다. 제 집 놔두고 그 차가운 공장 바닥에서 새우잠을 잘 남편을 생각하면, 몇 번을 고쳐먹은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만나러간다. 그렇게라도 얼굴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2009년 6월>

남편의 회사에서 1000명에 가까운 정리해고 조치가 단행했다. 해고사원들에게 노란봉투가 배달되던 날, 회사에 있던 남편은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남편은 나에게도 왔구나 하고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으나, 전화로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해고가 아닌 소환장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도 아내는 산자가 되었으니 돌아오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뜻을 끝까지 믿어줄 작정이었다. 

 

이후에도 소환장 및 가압류서류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아내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변에서 뭐가 왔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한다. 아내가 못 보게 우편물을 챙겨달라고,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했으나, 두 번째 날아온 가압류서류는 아내에게 들켰다. 아내는 정말 힘들게 10원, 20원 아끼며 마련한 이 집마저 빼앗길까 걱정이고, 충격이다. 남편은 잘 둘러대서 아내를 안정시켜 보려 애쓴다.

 

<2009년 7월>

공권력이 개입하고, 출입구가 경찰에 넘어가면서 이젠 가족들의 주말 출입마저 봉쇄되었다. 늦은 밤 회사로 찾아온 아내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아내는 그 무서운 상황에 놀랐는지,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다면서 눈물을 보인다. 그리고 경찰이 왜 이렇게 가둬두고 당신이 죄인처럼 이래야하는지 물었다. 남편은 할 말이 없다. 그저 애들은 잘 있냐고 묻는다. 잘 크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아내를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고 싶지만, 몸도 마음도 모두 철조망에 가로막혀 있다.

 

며칠 뒤 새벽, 남편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공장을 빠져나왔다. 아내가 걱정이었다. 집으로 와보니 아내는 걱정과 달리 기분이 좋았다. 처남의 휴가 기간 동안 아이들과 수영장을 다녀오기로 했다며 입장권까지 흔든다. 이천에서 사는 처남은 매형의 상황이 이렇게 된 후 부쩍 더 조카들을 챙긴다. 8월에 있던 휴가까지 앞당겼다. 남편은 생각보다 잘 견뎌주는 아내가 고맙고, 제 역할 대신해주는 처남이 고맙다.

 

남편은 또 다시 새벽을 틈타 공장으로 돌아왔다. 회사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아내의 전화도 자주 오고, 목소리도 좋아져서 절반의 걱정은 덜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날벼락 같은 아내의 전화가 왔다. 아내는 울며불며 왜 날 속였냐고 묻는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던 길, 아내는 사측 직원의 아내를 만났다고 했다. 그대로 있다간 집도 뺐기고, 남편도 감옥에 가고, 회사에서도 해고당할 거라고 했단다.

 

남편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로 둘러대 보지만, 이제 아내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남편은 노조간부였기에 사실 그동안 사측의 더러운 협박공작은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벌어졌고, 그 순간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아내의 전화도 뜸해지고, 목소리도 완전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남편의 짐은 두 배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더 이상 몰래 빠져나갈 구멍도, 어떤 다른 결심을 할 순간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는, 그 극단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알려진 객관적 정황과 남편 이씨와 한 인터뷰로 가늠해본 이 모든 상황에도, 엄마로써, 네 살 아이와 8개월 갓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써의 고민은 없다. 그 고민을 포함해 다시 써보려 해도 짐작조차 안 되기에 포기한다.

 

과연 누가 이만큼의 짐을 버텨낼 수 있을까? 쌍용차 가족들도 아마 그동안 쌓여온 오기로, 눈에 밟히는 자식들의 힘으로 간신히 간신히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제발 그들에게 신의 따뜻한 배려가 함께 하길 바란다. 다음은 남편 이씨와 한 인터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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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시신이 영구차에 실리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 이모씨와 누나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동생 박모씨. ⓒ 안승권

아내의 시신이 영구차에 실리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 이모씨와 누나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동생 박모씨. ⓒ 안승권

 

- 둘째 아이가 태어난 날이 정확히.

"2008년 12월 7일이다."

 

- 둘째 출산 이후가 첫째 때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은데.

"첫째 때는 마냥 좋았다. 2002년 결혼하고 4년 만에 첫아이를 봐서 더 그랬다. 그때도 아이의 100일 무렵에 파업도 했지만, 자주 나와서 아내와 아이 곁에 있을 수 있었고, 100일 잔치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가 태어나던 달에 임금체불이 시작되고, 더군다나 내가 아내 옆에 있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래주지 못했으니 아내 입장에서도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 구체적으로 임금체불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12월은 예정된 급여일이 며칠 지나고 나서 지급됐고, 1월부터 연월차 수당 등이 체불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지급되는 금액이 줄어왔다. 결국 지금은 50%까지 줄었다."

 

- 체불이 계속되면서 아내가 어려움을 호소한 적은 없었나.

"통장잔고 같은 거 얘기해주면서 이번 달에는 없다, 없다, 계속 얘기를 했다. 그러다 조금 들어오고, 또 금방 없어지고. 계속 그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거, 그것도 아이들 위한 것만 사고 그랬다. 아내는 원래부터 자기를 위해서 1000원 한 장도 안 쓰던 사람이었다."  

 

- 노조간부도 작년 12월에 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 아내의 반대는 없으셨는지.

"물론 반대 했다. 전에 대위원 생활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도 늦고 새벽에도 나가고 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래서 처음 제의를 받고 아내 걱정 때문에 고사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제의에 일주일정도 있다가 아내에게 얘기를 했고, 걱정과 달리 아내는 덤덤히 허락해주었다. 당신이 올바른 일이라 믿고, 정말 하고 싶으면 가서 하라고."

 

- 우울증 얘기가 나오는데 처음 치료를 받으신 게 언제인지.

"4월초 쯤 심장이 떨린다고, 그래서 병원에 갔던 건데, 의사가 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다. 거기서 우울증 초기증세라고 얘기했었고, 그때는 치료받고 금방 좋아졌다."

 

- 심장 떨리는 거 말고 다른 증상은.

"불안하다." 

 

- 그럼, 얘기가 나오는 산후우울증 같은 것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죄인도 아닌데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난 부부

 

- 보통 집에 얼마나 자주 들어갔나.

"많아야 일주일에  두세 번 가곤 했다."

 

- 그러다 5월 22일 총파업 이후에는 아예 못 들어간 건가.

"못들어 가긴 했지만 그때는 주말이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서 만나고, 애들 얼굴 보여주고 그래서 다행이었는데.."

 

- 정문봉쇄 되고 나서는 그런 것도 아예?

"아니, 이후 한 번은 밤에 면회를 온 적도 있었다. 아내가 철조망 사이로 나를 보고 펑펑 울었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그것도 못 한 거고."

 

-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분이 마주보고.

"그렇다. 경찰이 출입을 봉쇄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 그때 아내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아내는 내 얼굴 보더니, 울면서 오빠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다. 경찰들이 이렇게 막고 가둬두고 있으니까 이상하다. 죄인도 아닌데 왜 이러냐고 하고... 내가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하니까, 잘 크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 그럼 그런 상황에서 11일 집에 다녀갈 때는 어떻게 출입한 건지.

"새벽에 연구소 쪽으로 가서 경찰들 왔다 갔다 할 때 몰래 빠져나왔고, 다시 들어갈 때도 새벽에 몰래 들어갔다."

 

아내를 겁에 질리게 한 소환장과 압류서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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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할머니가 고인의 시신이 운구차에 실리는 모습을 보며 오열하고 있다. ⓒ 안승권

아이들의 할머니가 고인의 시신이 운구차에 실리는 모습을 보며 오열하고 있다. ⓒ 안승권

- 소환장이 날아온 구체적인 시점이 언제인가.

"소환장은 사측에서 노란봉투 배포한, 그 해고자 통보가 가던 날 왔다. 그날 나도 대상자인지 확인이 안 된 상태였는데, 아내에게 이게 뭐냐고 울면서 전화가 왔었다. 난 해고통지 인줄 알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얘기했더니, 알고 보니 소환장이었다."

 

- 그때 많이 놀라셨을 거 같은데.

"아내가 정말 많이 놀랐다. 울고불고."

 

- 이후로도 소환장이나 가압류 통지가 날아온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어떻게?

"장모님에게 부탁을 했다. 처음 가압류통지가 왔을 때는 다행히 내가 확인해서 보여주지 않았는데 두 번째는 아내가 확인을 했고 또 걱정을 하기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안심을 시켰다."

 

- 그때 아내의 반응은.

"날 믿었다. 지금까지처럼. 사실 그 때문에 걱정돼서 토요일 날(11일) 집에 갔던 건데, 의외로 아내는 많이 걱정하지 않고 있었고, 애들하고 처남하고 수영장 가기로 했다며 즐거워했다."

 

- 그럼 그때까지는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나.

"이후로 돌아와서 전화도 하루에 서너 통씩 하고 좋았는데..."

 

- 그럼 언제부터.

"목요일 날(16일) 아내가 어린이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산자 부인들이 OO씨는 살았는데 왜 거기 있느냐, 집도 뺏기고 감방 가고 회사도 잘린다. 막 그렇게 이야기했다면서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왜 나한테 속였냐. 회사에서 다 진행한다는데 얼른 나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고, 올바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계속 안심시키긴 했는데. 안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그때의 기억이 안타까운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후 기자가 장례 이후 소환에 응할 것인지를 묻자 "일단 아이들부터 추스르고..." 라고 답했다.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이씨. 그는 지난 20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지가 제일 걱정이라고 했다. 힘겨워하는 그에게 기자도 힘겹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아이들한테 어떻게 얘기 할지 생각하셨는지. 큰아이도 아직 전혀 모르고 있는 건지?

"........"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직 모른다. 나중에 더 크면 다 이야기해야겠지만, 지금은 선녀와 나무꾼이야기를 빗대서 말해주려고 한다. 엄마가 OO이 낳고 선녀가 돼서 하늘나라 갔다고. 그리고 아이들 방 천장에 별도 하나 붙여주려고 한다. 하늘로 간 엄마별."

 

아이들 방 천장에는 이미 별이 붙어있다. 외할아버지별과 친할아버지별. 할아버지가 잇따라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아이들 방 천장에 형광별을 붙여주며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하늘로 가셔서 별이 되었다고. 이제 그곳에 엄마별 하나가 더 해진다. 천장의 별이 엄마의 자리를 다 채울 수 는 없겠지만, 엄마별이 부디 아이들 가슴속에 상처가 아닌 따스함으로 자리 잡길 기도해본다. 

#쌍용차 #쌍용자동차 #노조간부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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