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간첩 딸' 아닌 27살 김혜진으로 살겁니다

23년동안 '간첩' 누명 썼던 아버지에게 법원이 '무죄' 선고했어요

등록 2009.07.30 11:45수정 2009.07.3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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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경 민가협에서는 양심수의 어린 자녀들에게 아빠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이다. 민가협에서는 이 그림으로 그림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1991년경 민가협에서는 양심수의 어린 자녀들에게 아빠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이다. 민가협에서는 이 그림으로 그림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김혜진

나는 '간첩'의 딸이다. 1986년부터 내 아버지는 법적으로 간첩이었다.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부터 23년 동안 그러했다. 그가 억울하다고 아무리 항소하고 고문한 보안관 수사관들을 상대로 고소를 해도 모두 거부당하고, 오늘, 2009년 7월 30일 오전 9시 20분 재심 판결 무죄 선고가 나기까지 그러했다. 드디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아버지가 43일간 광주 보안대에서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어 7년 형을 선고 받고, 23년 세월을 누명을 벗기 위해 싸웠다. 아버지는 보안대의 잔혹한 고문과 검찰의 폭력과 법원의 외면 속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일본에서 입던 스웨터와 가지고 있던 옛날 수첩 등이 조총련에게 포섭되어 간첩 활동을 한 증거가 되었다. 검찰조서실과 법원 공판장에서도 무죄를 주장했고 당시 아버지를 검찰조서실로 송치해주고, 검사의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폭언과 폭행을 목격한 교도관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법원으로부터 간첩임이 인정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작성하지도 않은 진술조서에 스스로 무인을 찍은 적이 없다고 했다.

'간첩'이란 이름 때문에 겪어야 하는 두 가지 얼굴

 엄마 김희유, 가족 밖에 모르던 '순진한' 엄마는 아버지가 간첩으로 조작되자 거리로 뛰어나왔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라는 머리띠가 선명하다.
엄마 김희유, 가족 밖에 모르던 '순진한' 엄마는 아버지가 간첩으로 조작되자 거리로 뛰어나왔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라는 머리띠가 선명하다. 민가협
평범하던 옆집 가장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 얼굴을 한다. 내 주변 가까운 곳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충격적이라는 얼굴 뒤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얼굴. 또 사람들은 짐짓 뭔가 아는 것처럼 위로하듯이 얘기한다. 그 시절은 그랬을 거라고.

23년 동안 우리 가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할 데 없는 황망함, 이해하는 듯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를 하는 이중적인 시선. 간첩의 가족에게는 허락해주지 않는(줄 것 같지 않은) 관계와 위치에 대한 갈증. 이런 것들에서 나오는 외로움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아버지의 일은 감추어야 하는 무엇이 되었고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과는 감정의 괴리가, 사회에서는 고립이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착한 딸이었다. 공부도 남부럽지 않게 해냈고, 남들보다 조금 성숙했고, 어릴 때부터 집안에 대해 걱정했다. 나는 내 생활의 선택과 의미 부여를 내 아버지의 일을 중심으로 결정하였고,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며, 지극히 현실적 선택만을 했다. 그렇게 수년동안 아버지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생활고를 견디며 조용히 사회속에서 고립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무죄 선고가 막연했던 것 만큼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 현실에는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당신의 남편은 간첩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겪은 고통과 싸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밥하고 빨래만 하던 여리고 젊은 어머니가 하루 아침에 남편이 간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첩의 아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경제적 책임까지 져야하니 그런 날벼락이 또 있었을까. 


어머니는 어린 우리 남매에게 전혀 아버지의 일을 우리에게 감추지 않았다. 오빠와 나를 두고 농성을 하기 위해 몇날 며칠 집을 비울 때도 아버지를 위한 싸움을 하러 간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아버지가 무고한 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각인시켜주었다.

 지난 6월 25일 열린 재심재판때 엄마 김희유가 공판일정이 적힌 법정앞 게시판에서 웃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열린 재심재판때 엄마 김희유가 공판일정이 적힌 법정앞 게시판에서 웃고 있다. 민가협
그때 어머니가 찾아간 곳은 민가협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비슷한 사례를 가진 가족들이 수십 명 모여 있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난지도에 끌려가 버려지며 곤봉과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도 잦은 농성과 악바리 같은 목소리로 그저 "남편을 석방하라"는 말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풀려나는 그 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명활동을 했다. 오늘이 있게 된 가장 커다란 힘은 바로 엄마 김희유다.

2008년 11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작의 개연성이 있다는 결정을 받아내기 까지 20년. 그 세월 동안 아버지와 가족이 국가권력 앞에 겪어야 했던 좌절과 개인으로써의 무력감은 점점 익숙한 일이 되어갔다.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증거로 제출된 것들을 뒤집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도 20년이 걸렸고, 본인의 자료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과거사를 밝히려는 정부의 의지와 도움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 아버지 사건은 지금까지도 '외부로 유출될 경우 불필요한 새로운 분쟁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고 보여지'(사건 기록 열람 등사 불허 통지 中, 1995년)기 때문에 재심의 여지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간첩의 딸'이 아닌 '스물일곱 김혜진'으로

아버지는 작년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 약 3개월 동안, 서울 봉은사로 고문피해자들 집단 상담 치료 모임을 다니셨다. 이 모임에서의 상담과 치료가 아버지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에서 많은 부분 자유롭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온다고만 하셨으나, 다녀오신 이후에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이 많이 누그러들었고, 실제로 곁에서 보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며 놀라워하셨다.

고문에 의해 망가지는 것은 육체적인 것 뿐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 그 이상으로 사회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망, 불안, 공포, 우울 등이 병적으로 커지고, 가족과 사회적 관계까지 파괴시킨다. 아직도 그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도 지금도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입 다물고 침묵 속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피해자들이 재심결정을 기다리며 무죄를 바라고 있는데, 국가차원에서 재심청구인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 재심결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피해자들의 치유를 통해 더 인간적인 생활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할 것이다.   

2009년 6월 25일 재심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작고 왜소했지만, 어느 때 보다 편하고 자유로워보였다. 공권력에 의해 파괴된 한 개인의 삶을 되돌리기에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통의 삶'을 되찾기가 로또 당첨 되기 보다 어려울 수 있다. 넓고 멀리 본 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어 오늘이 가능했다.

오늘 나는,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간첩의 딸'에서 '스물 일곱살, 김혜진'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2009년 6월26일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지원의날' 대회에서 아버지 김양기가 '봉은사치유모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2009년 6월26일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지원의날' 대회에서 아버지 김양기가 '봉은사치유모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민가협

김양기 조작간첩 사건은?
김양기씨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여수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한국전쟁 때 처형당했다.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난 김양기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얘기는 알지 못한 채 재가한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손에 자랐다. 14살에 할머니 마저 돌아가시고 남의 집에서 살게되어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세 형제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 남아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군대를 제대하고 홀로 어렵게 살고 있는 김양기를 걱정한 숙부가 자신의 운수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어 일본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일본업체일을 하다가 1984년 자신의 사업인 귀금속 사업을 여수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사건이 나던 1986년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30대 가장이었던 김양기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방문한 숙부와 함께 느닷없이 광주보안대로 연행되어 43일간 불법 구금을 당했다. 그 시간동안 물고문, 전기고문 끝에 일본에서 조총련 소속 간첩에게 포섭되어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하였다고 꾸며졌다.

국방부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광주보안대 수사관들은 피해자의 간첩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해자 부친의 과거 부역사실, 일본에 자주 왕래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대공관련 혐의점이 농후한 것"으로 판단하고 김양기를 연행하였다. 광주보안대 수사관들은 김양기를 강제연행하여 보안부대 조사실에서 고문수사를 하고서, 수사기록은 모조리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이 작성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몄다. 보안사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 조사시 보안대 수사내용을 부인하자 검사는 오히려 신고있던 슬리퍼를 벗어 "여기서 부인하면 어쩌란 말이야 이 자식아"하며 김양기를 때렸다. 법정에서도 역시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검사에게 맞는 장면을 목격한 교도관이 피고측 증인으로 나와 검사의 폭행사실을 증언했지만 법원은 김양기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선고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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