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도 없고 자판기 하나 없는 관광지에 가다

김수종의 문경·예천·영주 여행기 ⑤

등록 2009.08.04 18:06수정 2009.08.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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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주  무섬마을 모래사장에서

영주 무섬마을 모래사장에서 ⓒ 김수종


경북 영주시 북쪽에 있는 봉현면 본가에서 남쪽에 있는 문수면 무섬마을까지는 자동차로 20~30분 정도 걸린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잔 마시고 천천히 출발을 해 오전 10시경 무섬에 도착했다.

무섬은 마을을 알리는 홈페이지도 없고, 가게도 없고, 그 흔한 자판기도 하나 없는 관광지다. 그래서 외지인이 오면 볼 것이라고는 한옥과 초가집, 모래사장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외지인과 함께 하는 행사는 1년에 단 두 번 정도이다.


하나가 정월대보름날 마을 앞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풍년기원 달집태우기'이고 다른 하나는 가을에 열리는 '외나무다리 만들기와 건너기 행사'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마을주민들의 자치행사를 외부 관광객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관광객만을 위한 행사는 아니다.

따라서 관광객들이 방문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고, 혹여 관광객들이 방문한다고 해도 마을 경제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게도, 식당도, 매점도 없고, 민박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규약으로 이런 것들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도시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무섬마을의 선비기질과 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상업화 자체를 금지한 주민들의 정신이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박정희 정권 때 물길을 돌리는 공사는 착공식을 하고서도 주민 반대로 시작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의 정신과 의식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치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 산실
       
a 영주  무섬마을

영주 무섬마을 ⓒ 김수종


a 영주  무섬마을에서 발견한 예쁜 꽃

영주 무섬마을에서 발견한 예쁜 꽃 ⓒ 김수종


고고한 선비의 기상이 있기에 그 어려웠던 일제치하에서도 신분의 차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을 세워 민족교육과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큰 역할을 했다.


현지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아이를 데리고 가야하는 길이라 시원한 물과 삶은 옥수수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출발을 했다.         

수도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 해우당 옆에 마련된, 차 10여대 정도를 겨우 세울 수 있는 조그만 주차장에 차를 놔두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섬에도 현대식 양옥집이 몇 집 있는데 주차장 옆에 현대식 집이 하나 있었다. 마당에는 텐트도 처져있다. 여름휴가라 친척들이 오랜 만에 와 손님들이 많고, 차도 많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 있어 좋았다. 

더운 날씨라 애초부터 청록파 시인인 동탁 조지훈이 시심을 일구던 처가 김뢰진 가옥과 박남 박씨 입향조의 가옥인 만죽재 종택, 선성 김씨들의 대종가인 무송헌(撫松軒) 종택, 해우당 고택 정도를 둘러 볼 생각으로 출발을 했다.  

여든여덟 노구에도 자리를 짜는 어르신
        
a 영주 무섬마을에서 만난 자리 짜는 노인

영주 무섬마을에서 만난 자리 짜는 노인 ⓒ 김수종


a 영주 자리 짜는 노인 김두한 옹

영주 자리 짜는 노인 김두한 옹 ⓒ 김수종


만죽재 종택으로 가는 길 우연히 한 고가에서 노인이 자리를 짜는 모습이 보였다. 툇마루에 나와 앉아 천천히 자리를 짜는 모습이 시선을 자극했다. 여든 여덟 노구로 자리를 짜고 있는 김두한 옹은 봄, 가을로 마을 주변 개천에서 부들을 베어 말려, 시간이 많은 여름밤이면 보름에 걸쳐서 자리 하나를 짠다고 했다.

하루 3~4시간씩 늦은 밤에 보름 정도 시간을 두고 자리를 짠다. 봄, 가을에 손수 부들을 베어 말리면, 단순하게 계산해도 하루 6~7시간 노동에 보름 치 일당이 나와야 하는 일이다.

자리 1장은 15만원을 받는다 했다. 나이든 노인이 소일로 하기에는 맞지만, 노동력과 인건비를 생각한다면 그 열배는 받아야 할 것 같은 수고로 보였다.               

돈이 있다면 나라도 현금으로 일백만원쯤 주고 사오고 싶었지만, 가난한 도시빈민에게는 꿈일 뿐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젊은이들은 관심도 없고, 노인들을 통해서만 그 명맥이 이어지는 공예품의 현실을, 전통 문화 현실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자리 짜는 노인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섰다.

350년 전에 지어진 한옥, 100여년 전 후손이 개보수

a 영주 무섬마을

영주 무섬마을 ⓒ 김수종


a 영주  무섬마을 만죽재 종택

영주 무섬마을 만죽재 종택 ⓒ 김수종


이어 만죽재 종택이다. 무섬마을에 처음 들어온 박남 박씨 입향조 박수의 집으로 350년 전 70여 칸의 한옥으로 지어져 '섬계초당(剡溪草堂)'으로 불렸다. 한옥임에도 초당이란 이름을 쓴 것은 겸양과 청빈의 선비정신이 포함된 이유다. 현재의 한옥으로 개보수된 것은 10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마을 중앙에 있는 집이라 위치도 좋고, 집 옆에 2년 전 복원된 서당에 들어가 보니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11대 종부가 홀로 살면서 자주 청소도 하고 손님도 가끔 오는지 집도 비교적 깨끗하고 서당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당일은 서울 사는 사위와 딸, 외손자들이 온다고 하여, 특히 청소를 잘해두어 편하게 보고 왔다. 서당에 마련된 돗자리 위에 앉아 연우랑 함께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잠시 쉬기도 했다. 서당에는 최근 입향조 박수 선생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섬계초당'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정갈한 고택에 특히 툇마루가 좋았다. 손님들과 툇마루에 앉아 술을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종부에게 감사인사를 드린 후, 우리 가족은 이웃한 무송헌 종택으로 이동했다.

a 영주  무섬마을

영주 무섬마을 ⓒ 김수종


무송헌 종택은 무섬에 반쯤 터를 잡고 있는 선성 김씨들의 대종가로 원래 영주시내의 구성산성 옆에 있던 종택이 수십 년 전에 헐리고, 종택이 없는 종가로 남아 위패만 사당에 모시고 있었다. 종가는 무섬 인근 문수면 적동리로 옮겨 살았다.

적동리에서 다시 대구로 이주했던 무송헌 김담 선생의 19대 종손인 김광호씨가 일가들의 도움으로 2년 전 귀향하면서 새롭게 마련된 종택이다.

종손이 영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대구로 옮겨 20년 가까이 사업을 하다가 2년 전 문중의 도움으로 새롭게 터를 잡았으니, 무송헌 김담 선생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종택의 이름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현판은 안동 퇴계종손이 직접 써준 것이라고 한다.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년~1464년)선생은 영주출신으로 호는 무송헌이며 조선 세종~문종 때의 명신이다. 이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절(文節)공이며, 단계서원(丹溪書院), 구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역법서를 제작한 천문학자로 세종대왕 당시 집현전 학사로 17년간 재직했다. 재직 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內外篇)의 편찬을 주도했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전문가들은 아랍의 천문학보다 앞선 동 시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이 이러한 수준의 연구를 한 것이 1682년이라고 하니 우리보다는 200년 이상 뒤진다.
#무섬마을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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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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