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붉은 의자'에서 상현은 쉴 수 없었다

[서평] 주수자 작품집<붉은 의자>

등록 2009.08.06 09:14수정 2009.08.0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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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붉은 의자>(주수자 지음) 겉그림. 송이당 펴냄.

<붉은 의자>(주수자 지음) 겉그림. 송이당 펴냄. ⓒ 민종원

▲ <붉은 의자>(주수자 지음) 겉그림. 송이당 펴냄. ⓒ 민종원

글마다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사람마다 독특한 냄새를 풍기듯이. 그렇다보니,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냄새는 그이가 내놓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게다가 '부모' 생각과 마음마저 닮은 '자식'들은 '누구 자식 아니랄까봐' 하는 말마저 하게 만든다.

 

둥그스레한 안경알 너머 조금 내려다보는 눈매를 보고, 거기서 다시 조금 아래 얼굴 한쪽 모서리를 살짝 감싸 쥔 왼쪽 손으로 넘어가며, 서둘러 다시 반대 쪽 얼굴 귓불에 매여 스스럼없이 늘어진 채 한껏 침묵을 즐기는 귀걸이를 보고 있자니 <붉은 의자>(송이당 펴냄, 2009)를 보는지도 모르겠다 싶은 지은이 얼굴이 그득하다. '작가의 말'에 잇닿은 그이 얼굴은 말은 없고 생각은 그득한 채 한쪽 면을 꽉 채웠다.

 

주수자 작품집 <붉은 의자>는 앞뒤 겉그림을 온전히 다 채운 장성순 화백 그림과 묘하게 어울린다. 그이 작품집 <붉은 의자>는 고요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속내를 드러내며 말 없는 얼굴 깊숙이 들어앉은 '어둔' 자아를 보일 듯 말듯 드러내고 감추고 또 드러낸다. 책은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사람을 다룬다. 아니, 좀 더 말을 잇자면 사람을 말한다기보다 마음 속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책은 괜스레 아슬아슬하고 아련하기까지 하다.

 

심리학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사람 속을 참 진득하게 들여다보며 지켜보고 살피는 그이 시선은 그대로 말이 되어 책을 이루었다. 어느 것이 지은이 말이고 어느 것이 화자 말이고 또 어느 것이 글 속 등장인물들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이 책은, 붉은 피를 '살아있음'의 증거물처럼 울컥울컥 쏟아낼 것만 같은 느낌이 잔뜩 배여 지우기 힘들어 보이는 그 이름은 <붉은 의자>이다.

 

'붉은' 낯빛으로 살아있다는 표시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어둔' 시간들을 '붉은' 얼굴로 감추듯 감싸듯 하는 여자들이 여기 있다. 핏빛 삶이었어도 검게 타버린 마음만 남았어도 '붉은' 얼굴이 있는 한 '살아있음'을 목청껏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검게 혹은 붉게 물든 이야기는 우울하기도 하고 음울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억울하기도 하다. 붉은 우수에 찬 얼굴들이 즐비하다.

 

'붉은 의자'에서 주인공 상현은 유학 간 미국에서 다른 이름을 얻는다. 브레이크 교수 부인이 지어준 이름, 원래 자기 이름이 아닌 이름, 상현도 모르는 '상현'을 급조해낸 듯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이름은 샌디이다.

 

샌디는 아니 상현은 한국을 거닐다 미국으로 튕겨져나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아버지는 자주 밥상을 엎고, 어머니를 발길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고, 성질 못된 아이처럼 굴었"던 모습들을 다 지우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서둘러 싼 보따리 풀 듯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은 상현도 샌디도 아닌 '붉게' 상기된 얼굴만 또렷이 드러낸다.

 

불안한 것이나마 어찌하든 유지하고 싶었던 마지막 그 무엇이었다고나 할까, 잠 잘 때마다 자기 몸을 어딘가에 매고 자는 버릇을 지닌 상현은 몽유병 때문에 길 없는 길을 밤마다 찾는다. 불안한 삶, 불안한 마음, 그래서 더욱 불안한 기억들은 몽유병에 실려 밤마다 길 없는 길을 헤매다 가지 말아야 곳에 이르기도 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브레이크 교수 방이다. 온갖 쓰라린 '붉은' 삶들을 살아낸 여자들이 보일 듯 말듯 말할 듯 말듯 하며 쏟아내는 것들은 그야말로 '살아있음'이다.

 

'열다섯 시간의 묵음(黙音)'의 중년 홀아비나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의 신부처럼 '남자'를 그려내는 글이 없지 않지만 <붉은 의자>는 '붉다'가 오로지 여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속 깊은 그 무엇이라는 듯이 말을 아끼고 또 아낀다. 아끼고 보듬는 것은 사실 붉은 심장도, 붉게 물든 얼굴도 아니고 차라리 어둠과 기억과 상처가 얽히고설킨 채 그대로 이어져 온 '붉은' 여심(女心)이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사건도 사라지고 사람도 감추어진 채 도드라지는 것이라곤 오로지 '붉은' 기억들이며 '붉은' 마음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다성음악의 수사법, 또는 저자와 극중 화자 목소리들의 중첩은 일종의 듀오 연주 효과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작품을 다루면서 내가 지나치게 음악 형식과의 유비 관계를 설정하려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이중주 효과를 명확하게 짚어 낼 수 있는 형식적 근거는 「붉은 의자」에서 상현이 곧 샌디이며, 「하관」의 미아는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고, 또 「연어와 들고양이」의 제인은 한국 혈통이면서도 미국에 입양되어 성장한, 유목적이고 아이러니한 주체들의 실존적 조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붉은 의자>, '평론: 내 목소리의 배음(倍音)을 듣다: 기억과 환상', 269)

 

다시 '작가의 말' 아니 작가 얼굴로 돌아가 그이 고요한 침묵을 따라 묵묵히 사람을, 여자를, 마음을 내려다본다. 한없이 떠오르는 당당한 아침 해보다는 차라리 조금은 서글퍼 보일 정도로 살포시 내려앉는 부끄러움인 것만 같은 저녁노을. 연붉다기보다 검붉다고 해야 할 온갖 '붉은' 얼굴들이 그득한 <붉은 의자>. 여기서 문득, 조명 빛에 붉게 물든 흔들리는 의자를 보며 자리 잡지 못한 지난 기억들을 거듭 쏟아낼 수많은 '상현'은 편히 쉴 만한 아름다운 '붉은' 의자를 진정 여태껏 만나지 못한 것인지... 후,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붉은 의자> / 주수자 지음 / 송이당 / 2009.7. / 9500원

*이 서평은 제 블로그(blog.paran.com/mindlemin)에도 실을 계획입니다.

2009.08.06 09:14ⓒ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붉은 의자> / 주수자 지음 / 송이당 / 2009.7. / 9500원

*이 서평은 제 블로그(blog.paran.com/mindlemin)에도 실을 계획입니다.

붉은 의자 - 주수자 작품집

주수자 지음,
송이당(=숲속의꿈), 2009


#붉은 의자 #주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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