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징그럽게 탄압한 '아시아 음악의 진주'

[해외리포트- 신장 르포③] 위구르인과 생사고락 함께 한 '무캄'

등록 2009.08.08 18:19수정 2009.08.2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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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서도 실크로드로 상징되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땅이다. 하지만 지난 5일 우룸치에서 발생한 유혈시위는 낭만적인 이미지 속에 가려진 소수민족 위구르 문제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시위가 발생하기 1주일 전 우룸치, 투르판, 카슈가르 등지를 다녀온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 4편을 통해 경제개발 속에 가려진 위구르인의 고단한 현실과 이번 시위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살펴본다. [편집자말]
 루크춘 무캄을 연주하는 위구르 예술인들. 왼쪽부터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는 러와프, 두타르, 세타르, 다프, 아이젝 순이다.
루크춘 무캄을 연주하는 위구르 예술인들. 왼쪽부터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는 러와프, 두타르, 세타르, 다프, 아이젝 순이다. 모종혁

"무캄(Mukam·木卡姆)은 노래, 음악, 춤 등이 함께 어우러진 위구르인의 종합 예술입니다."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고도 투르판(吐魯番)시에서 60여㎞ 떨어진 루크춘(鲁克沁)진. 루크춘은 위구르 8대 무캄 중 가장 유명한 쿠차(庫車)의 다오랑(刀郎) 무캄과 쌍벽을 이루는 투르판 무캄의 본고장이다. 루크춘이 속한 피찬(鄯善)현은 고대 누란(楼蘭)왕국이 소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위구르 민족이 톈산(天山)산맥을 넘어 신장 서부지방에 처음 정착한 곳도 바로 루크춘이다.

투완말리촌에서 만난 슐레만 아부티(47) 루크춘 무캄전승센터 부주임은 "무캄은 위구르인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민족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루크춘 무캄의 역사는 대략 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유목을 하던 위구르인이 신장에 정주하면서 종교의식과 노동행위에서 불리고 춤추어진 것이 무캄의 시초"라고 밝혔다.

슐레만은 "고대부터 전승되어 온 유명하고 널리 보급된 무캄 형식에다 지역적으로 특출난 무캄이 더해져 12개의 무캄 대곡, 즉 12무캄이 완성됐다"며 "루크춘 무캄은 다오랑, 하미(哈密) 등과 더불어 가장 지역색이 강하고 독창적이다"고 말했다.

위구르인의 무캄은 중국 내에서 '아시아 음악의 진주'로 찬사받고 있다. 노래, 음악,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데, 무캄 예술인은 어떠한 악보와 문서 없이 오직 암기로 공연을 벌인다.

무캄에서 불러지는 노래는 위구르어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어, 아랍어, 고대 소그드어까지 섞여져 있다. 무캄에 등장하는 악기도 중국과 중앙아시아부터 인도, 이란의 악기까지 사용된다. 공연 형식은 화려하고 다양하며 역동적이어서, 처음 보는 이도 무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2005년 11월 무캄은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는 2001년부터 매년 한 나라에서 1개 항목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을 신청받아 심사한다. 무캄은 중국 내에서 장쑤(江蘇)성의 오페라 곤극(崑曲)과 3천년 된 7줄 현악기 고금(古琴)에 뒤이어 3번째로 선정됐다.


루크춘 무캄의 대표적인 예술인 투얼슨 쓰마이(57)는 "무캄이 유네스코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며 "루크춘 출신의 젊은 예술인은 우룸치(烏魯木齊) 및 주요 대도시에 나가 공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무캄은 노래, 음악, 춤 등이 함께 펼쳐지는 종합 예술이다. 모든 무캄 예술인은 각종 악기를 다루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무캄은 노래, 음악, 춤 등이 함께 펼쳐지는 종합 예술이다. 모든 무캄 예술인은 각종 악기를 다루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모종혁

 지금도 신장의 고산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투르크 계열의 카자흐족. 위구르인도 투르크 계열인 돌궐의 후손으로 유목민이었다.
지금도 신장의 고산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투르크 계열의 카자흐족. 위구르인도 투르크 계열인 돌궐의 후손으로 유목민이었다. 모종혁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을 탄생시킨 위구르의 정착사


위구르인의 고향 신장은 수천 년 동안 유목민족과 한족이 패권을 다퉈왔던 곳이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신장에 처음 정착한 민족은 인도유럽어족 계열 유목민이었다. 이들의 흔적은 고대 누란과 호탄(和田)왕국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두 왕국 유적에서 발굴된 미이라는 큰 키, 황금 머리카락, 오똑선 코, 깊은 광대뼈 등의 신체적 특징으로 갖추고 있다. 신장의 첫 정착민은 동서문명 교류의 메신저였다. 이들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유럽의 문명을 중국으로, 중국의 문화를 서구 세계로 전파시켰다.

머나먼 서역(西域)의 오랑캐로 치부됐던 신장의 유목민족이 중국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흉노의 등장부터다. 이미 기원전 8세기 주나라 때부터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흉노는 몽골고원과 신장을 비롯한 중국 서북부 대부분을 지배했다.

기원전 4세기부터 흉노는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을 빈번히 공격했다. 강성한 흉노 기마군대의 위력에 못 견딘 제후국들은 방어책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뒷날 만리장성의 시초가 됐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장건을 파견하여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화친을 맺으려 했다. 원하는 성과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장건이 가져온 서역의 정보는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흉노는 1세기부터 내부 분열과 중국 왕조의 잇단 공격으로 세력이 약해져갔다. 5세기 이후 흉노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6세기 중앙아시아와 몽골고원을 지배한 투르크 계열의 돌궐은 흉노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실제로 흉노의 문화와 풍습은 투르크민족과 일치한 것이 많다.

7세기 들어 부족 내 항쟁과 중국의 이간책으로 돌궐제국이 붕괴되자, 돌궐의 한 부족이었던 위구르인들은 신장에 뿌리를 내렸다. 744년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이 위구르제국을 건국하여 신장 전역을 장악했다. 위구르제국은 중국과 대응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는 대군을 파견해 평정했다.

840년 키르기즈민족에 의해 위구르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인들은 신장 각 지역에 크고 작은 왕국을 세웠다. 13세기 와서는 새로운 격변을 맞이했다.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에 흡수되면서 신장 전역에서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위구르인이 이슬람교를 믿게 것은 신장을 지배했던 차카타이 칸국 왕실이 이슬람에 귀의하고 널리 선교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까지 몽골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신장은 다시 청나라로 패권이 뒤바뀌었다. 18세기 러시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장성을 설치했다. 20세기 들어 청조가 멸망한 뒤 신장은 지역군벌의 통치를 거쳐, 공산당정권의 점령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투위거우에 남아있는 옛 마니교 사원 유적. 투위거우는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이 신장 동부지역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이다.
투위거우에 남아있는 옛 마니교 사원 유적. 투위거우는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이 신장 동부지역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이다. 모종혁

 신장 불교예술의 극치였던 베제클리크 석굴은 서구제국과 일본의 도굴꾼들이 대부분의 유물과 벽화를 약탈해가 폐허만 남았다.
신장 불교예술의 극치였던 베제클리크 석굴은 서구제국과 일본의 도굴꾼들이 대부분의 유물과 벽화를 약탈해가 폐허만 남았다. 모종혁

굴곡진 역사와 다문화 전통 위에서 발전한 종합 예술

굴곡진 역사만큼 위구르인의 문화예술은 격변의 역사와 함께 변천해왔다. 신장이 정착한 위구르인은 처음 마니교와 불교를 믿었다.

루크춘에서 10여㎞ 떨어진 투위거우(吐峪溝)에는 마니교의 번영상을 잘 볼 수 있다. 투위거우에는 3세기부터 만들어진 94개의 동굴이 있는데, 마니교 관련 벽화와 경전이 대량 발견되었다. 4~7세기 투르판을 지배했던 고창(高昌)왕국 시기의 무덤인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도 300여건의 위구르어와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불교 등 종교 문서가 출토됐다. 마니교는 위구르의 정착화를 촉진하며 위구르 문자 창제에도 공헌한다.

1세기 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신장의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불교는 3세기 초 투르판에 도래하여 5세기에는 왕실 종교로 자리 잡았다. 고창왕국과 위구르제국이 조성한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신장 불교예술의 정수로 꼽힌다.

베제클리크는 화염산 외곽에 왕실 사원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 석굴은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조성되어 수많은 불경과 그림, 벽화를 소장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온 도굴꾼들이 무자비하게 약탈해가 지금은 40여개 석굴에 벽화만 일부 남아있다.

13세기 신장 전역에 불어 닥친 이슬람화는 투르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에 이르러 투르판을 포함한 신장의 모든 투르크 계열 민족이 이슬람교도가 되면서 다른 종교는 자취를 감춘다. 이슬람교가 종교신앙이자 생활방식, 문화양식으로 신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투르판 시내에 남아있는 쑤궁타(蘇公塔)는 이슬람 건축예술의 대표작이다. 쑤궁타는 1777년 투르판 군왕 슐레이만이 지었는데, 높이 37m, 밑지름 10m의 신장 최대 건축물이다. 슐레이만은 아버지 애민호자를 기리고 알라신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탑을 지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무캄의 정리와 체계화는 신장의 이슬람화가 완성된 시기에 이뤄졌다. 16세기 초 차카타이 칸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야르칸드 칸국의 왕비 아만샤는 열렬한 음악과 시가의 애호가였다.

1547년 아만샤 왕비는 신장 전역의 연주가, 가수, 춤꾼 등을 초빙해 무캄을 수집·정리토록 했다. 난해한 고대 소그드어로 된 가사를 위구르어로 재창작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무캄은 더욱 세밀하고 규범화되어 12무캄으로 발전한다. 수세기 동안 무캄의 체계화가 이뤄졌지만, 기록과 악보 없이 오직 구전으로만 전해졌다.

 카슈가르 이드 카흐 사원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는 위구르인들. 중국정부는 공개장소에서 이슬람교와 관련된 노래의 공연을 금지하고 있다.
카슈가르 이드 카흐 사원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는 위구르인들. 중국정부는 공개장소에서 이슬람교와 관련된 노래의 공연을 금지하고 있다. 모종혁

공개장소에서 민족 역사나 이슬람과 관련된 노래는 못 불러

 포도를 수확하는 위구르 여성들. 무캄은 노동과 종교의식에서 시작해 명절, 혼례 등에서 불리고 연주되어 갔다.
포도를 수확하는 위구르 여성들. 무캄은 노동과 종교의식에서 시작해 명절, 혼례 등에서 불리고 연주되어 갔다. 모종혁
무캄은 단순한 노래와 연주, 춤이 아니다. 위구르인의 신화, 역사, 문화, 감정, 애환 등이 깃든 서사 시가다.

투얼슨 쓰마이는 "무캄의 노래 내용은 수천 년 전 중앙아시아와 몽골고원에서의 유목생활부터 신장으로의 정착, 시대의 변천, 지역의 역사와 풍속 등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루크춘 무캄만 하다라도 고대 소그드의 언어와 페르시아의 악기로 옛 위구르인의 전설과 민담을 노래한다"며 "무캄은 다양한 예술적 전통 위에 위구르인의 민족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 무캄에 쓰이는 악기 중 아이젝은 이란에 기원을 둔 궁현악기다. 또 다른 반주 악기인 탄부르는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출현하여 전해진 발현악기다. 대부분 위구르인 집안에 비치되어 사용되는 두타르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널리 쓰였다.

위구르인의 춤도 경쾌하고 우아하면서 변화무쌍한 동작과 빠른 회전으로 투르크 계열 민족 춤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처럼 무캄은 여러 문화권 문화예술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장자치구 무캄예술단은 지난 10여년간 30여개 국가에서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무캄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지만, 중국정부의 간섭과 통제는 그치지 않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무캄은 구문화의 대표적 산물로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는 무캄의 전승과 공연을 허용했지만, 위구르의 역사와 이슬람 종교사상을 담은 내용은 금지하고 있다.

슐레만 아부티는 "위구르인의 용맹한 기상을 노래하는 신화나 전설은 공연 레퍼토리에 담지 못한다"면서 "이슬람 교리나 알라를 찬양하는 노래도 대중장소에서 못 부른다"고 말했다.

카슈가르에서 만난 한 무캄 예술인은 "오늘날 무캄 노래에서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사랑, 외지에서 부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타지 생활에서의 고통과 애환 등을 주로 부르는 것은 이민족에 점령당한 위구르인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된 우리의 판소리가 민중의 애환과 지배계급에 대한 풍자를 노래한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투얼슨은 "무캄은 위구르인의 삶과 문화 그 자체"라며 "위구르인과 함께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룸치 국제바자르의 한 전문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무캄의 남녀 무곡.
우룸치 국제바자르의 한 전문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무캄의 남녀 무곡. 모종혁

덧붙이는 글 | 기사 내 모든 지명과 인명은 위구르어 현지 발음대로 적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내 모든 지명과 인명은 위구르어 현지 발음대로 적었습니다.
#신장 #무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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