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의 대모'를 누가 망명시켰나

[해외리포트- 신장르포④] 소수민족 갈등 부추기는 중국 정부

등록 2009.08.12 15:37수정 2009.08.2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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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서도 실크로드로 상징되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땅이다. 하지만 지난 5일 우룸치에서 발생한 유혈시위는 낭만적인 이미지 속에 가려진 소수민족 위구르 문제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시위가 발생하기 1주일 전 우룸치, 투르판, 카슈가르 등지를 다녀온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 4편을 통해 경제개발 속에 가려진 위구르인의 고단한 현실과 이번 시위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살펴본다. [편집자말]

달라이 라마 14세와 더불어 중국정부의 공적 1호인 레비야 카디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한때 중국정부의 대표적인 협력자이자 선전 대상이었다. ⓒ 월스트리트저널


'1992년 중국정부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위원으로 선출, 1995년 미국 <포보스>가 선정한 중국 부자순위 7위, 1997년 중국 내 언론매체가 꼽은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사업가….'

오늘날 중국정부가 '위구르 분리독립 테러집단의 수괴'로 손꼽는 레비야 카디르(61)의 중국 내 경력이다.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인 레비야는 세계위구르회의(WUC) 회장 겸 재미 위구르협회장으로 위구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중국의 폭압적인 통치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대표적인 위구르인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의 공적 1호가 된 레비야 카다르

레비야는 1948년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에 시달리다 28세에 이혼했다. 홀로 된 레비야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작은 세탁소를 열었다. 빨래판 세 개와 비누 다섯 개로 시작한 사업은 근면과 성실로 점차 키워갔다.

1980년대 말 레비야는 모은 돈을 밑천 삼아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백화점도 열었다.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위구르인들의 실업문제 해결과 복지증진에도 애썼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중국정부와 언론도 그를 '위구르인의 대모(代母)'로 치켜세웠다. 92년에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중국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레비야가 투사로 변모한 것은 1997년 2월 굴자(伊寧)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부터다. 당시 수천 명의 위구르인들은 분리독립 참여혐의로 감금된 주민을 석방해 달라고 집단시위를 벌였다.


중국정부는 군대와 무장경찰을 동원해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여 강제 진압했다. 최대 400명 이상 사망한 대량 학살사건이었다. 레비야는 사건 발생 후 현장을 찾아 위구르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같은 해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정협 회의석상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중국정부의 처사를 비판했다.

이 일로 레비야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됐다. 중국정부는 레비야의 정협 위원 지위를 박탈하고 남편인 시딕 로우지와도 강제로 이혼시켰다. 로우지는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기자로 위구르인의 고된 현실을 해외에 보도했다. 1999년 레비야는 신장을 방문한 미국 의회 대표단을 만난 뒤 체포되어 국가기밀 유출죄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 3월 중국정부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방중을 앞두고 보석으로 석방하자 바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레비야를 정치적 양심수로 지정하면서 2004년 '올해의 인권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위구르의 대모를 망명케 한 주범은 누구인가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룸치(烏魯木齊)는 중국 여느 도시 못지않게 고층건물이 즐비한 현대화된 도시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신장의 열매는 고스란히 정치경제적 실권을 가진 한족 차지가 되고 있다. ⓒ 모종혁


알바니아로 보내진 관타나모 위구르인들. 이들 중 일부는 스웨덴으로 가거나 일자리를 찾아 생활하지만 몇몇은 지금도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다. ⓒ 뉴욕타임스


정든 고향을 떠난 사람은 레비야뿐만 아니다. 지난 6월 11일 4명의 위구르인이 대서양에 있는 영국령 버뮤다 섬에 도착했다. 이들은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 내 테러범수용소에서 풀려나 7년 만에 자유를 얻었다.

2001년 말 아프가니스탄 모처에서 중국 국적의 위구르인 22명이 미군에 체포됐다. 위구르들인은 자신들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중국에 점령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비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전사라고 주장했지만, 미군은 이를 무시했다. 미군 당국은 체포된 위구르인들을 테러리스트로 분류하여 지구 반대편 쿠바 관타나모로 보내 감금했다.

관타나모에 수감된 위구르인들은 미군 조사요원의 철저한 심문을 받았다. 2003년 미국 국방부는 1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위구르인들이 미국에 적대적인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정부는 위구르인들을 석방하여 중국에 송환하려 했지만, 미국 내 인권단체들이 격렬히 반대했다. 비밀기지에서 위구르 독립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은 그들을 중국정부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국정부는 외교부 성명을 통해 관타나모 위구르인들을 테러범으로 규정하면서, 송환되면 국내법에 의해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관타나모 위구르인들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중국과 외교 분쟁을 일으키자 미국정부는 분주히 움직였다. 미국 국무부는 이들을 다른 나라에 보내기 위해 100개에 가까운 국가와 접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어느 나라도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6년 5월 첫 석방된 5명은 간신히 알바니아로 보내졌다. 미국정부가 알바니아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약속하여 성사됐다. 알바니아가 이슬람 국가이고 중국과 정치경제 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요인이었다.

4명의 위구르인이 버뮤다 섬으로 보내진 것도 돈의 힘이었다. 영국령인 버뮤다 측에 미국정부는 적지 않은 지원금을 지불했다. 현재 관타나모 수용소에 남아 있는 13명은 남태평양 팔라우 공화국으로 이송되는 방안을 추진되고 있다. 미국정부는 위구르인들을 받아들이는 대가가로 팔라우 정부에 2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원조를 약속했다.

결국 22명의 관타나모 위구르인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알바니아를 거쳐 스웨덴에 정착한 하킴은 1999년 신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 그는 1997년 굴자 유혈사태 때 시위를 참가한 뒤 중국정부의 계속된 감시와 탄압을 못 견뎌 1999년 키르기스스탄으로 탈출했었다.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정부에 피로 맞대응

6월 말 갓 생산된 멜론을 맛보는 위구르인들. 위구르인들은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가는 강력한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 모종혁


중국정부의 강제철거정책에 따라 1,2년 내에 헐릴 카슈가르시 야와거 마을에서 만난 한 위구르 어린이. 위구르인에게 전통가옥은 거주하는 집을 넘어 위구르 민족공동체의 기초 토대다. ⓒ 모종혁


문제는 제2의 레비야, 제2의 하킴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현실이다. 지난 달 5일 우룸치에서 발생한 유혈사태는 첨예한 위구르 민족문제가 현재진행형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유혈사태가 일어난 뒤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신장위구르자치구 주석은 "레비야가 주도한 분리독립 테러사건"으로 규정하면서 "다수의 분리주의자가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언론매체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무고한 한족이라며 위구르 분리독립주의자들의 야만성을 강력히 비난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재까지 197명이 숨지고 1700여 명이 다쳤다. 291곳의 상점과 29채의 가옥이 전소되고 633채의 주택과 상점이 파손됐다.

중국정부의 주장이 100% 다 틀린 것은 아니다. 우룸치 유혈사태의 첫 도화선은 런민(人民)광장과 국제바자르 일대에서 벌어진 위구르 청년들의 시위다. 그들 중에는 분명 분리독립단체 소속원도 있었다. 하지만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요구는 간단했다. 6월 26일 광둥(廣東)성 샤오관(韶關)의 한 공장에서 일어난 위구르 노동자들에 대한 한족 노동자의 습격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이었다.

한족 노동자들은 위구르인들이 한족 여성 노동자 2명을 강간했다는 헛소문에 폭력을 휘둘렀다. 공식 발표로만 위구르인 2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우룸치정부가 위구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며 머나먼 광둥까지 보냈던 두 청년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샤오관 사건을 전해들은 위구르인들은 분노했지만, 중국정부는 위구르 분리독립주의자가 일으킨 소행이라며 조기 매듭에만 급급했다.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중국정부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에 대한 동정심은 위구르인들을 분연히 거리로 나서게 했다.

이런 위구르 시위자들을 중국정부는 곤봉 세례로 진압했다. 2004년 중국 최초로 우룸치에 설립된 대테러 경찰부대(特警)의 진압방식은 혹독하고 잔인했다. 아무런 죄 없이 죽은 동족의 원혼을 달래려는 요구가 무력으로 짓밟히자, 흥분한 위구르 청년들은 폭력으로 맞대응했다. 눈에는 눈, 피에는 피의 방식으로 한족 주민들에게 분풀이한 것이다.

중국정부가 위구르인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였다면 우룸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샤오관 희생자에 대한 진실 규명을 뒤로 한 채, 위구르 분리독립주의자의 소행으로만 돌림으로써 위구르인에 대한 이미지만 훼손시켰다.

현재 대다수 한족들은 위구르인을 테러리스트나 소매치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작년 8월 베이징올림픽 전후 위구르 분리독립단체에 의해 일어난 일련의 테러사건과 여러 대도시에서 암약하는 위구르인 소매치기단의 행위에서 기인한다. 중국 언론매체는 사건의 본질과 배경을 외면한 채 보도하여 일반대중에게 그릇된 인식만 심어주고 있다.

소통은 내던지고 갈등을 부추기는 중국정부

위구르 전통음식인 낭을 파는 소년. 위구르인들은 언어·종교적 제약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길 힘들다. 이 때문에 위구르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진학을 포기하고 장인이 되려한다. ⓒ 모종혁


우룸치의 한 야시장에서 양꼬치를 굽는 위구르 청년. 신장 내에서 경쟁이 심해지만 중국 각지로 흩어져 양꼬치 장사로 생업을 잇는 위구르인들이 늘고 있다 ⓒ 모종혁

위구르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은 우룸치 유혈사태 후 증폭됐다. 당시 우룸치에서는 위구르인들이 한족 일가족 4명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샤오관사건의 보복에 대한 우룸치 주민이 마시는 수돗물에 독을 탈 것이라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이런 헛소문은 인터넷을 통해 중국 전역에 그대로 퍼져나갔다. 한족 누리꾼들은 위구르 폭도들을 멸종시키고 신장에서 핍박받는 동족을 구원하자며 감정서린 주장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중국정부가 포털과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우룸치사태 관련 게시물은 삭제해 나갔지만, 제대로 통제가 되질 못했다.

우룸치 유혈사태의 근본 원인은 간단하다. 위구르 문제는 위구르인을 절망케 하는 경제사회적 소외의식과 박탈감, 중국정부와 한족이 사회적 약자인 위구르인을 감싸지 못하는 소통 부족에서 비롯됐다.

지난 6년간 신장은 풍부한 지하자원, 중앙아시아 주변국과의 변경무역 등을 발판으로 두 자릿수의 GDP(국내총생산) 성장을 거두었다. 인구 밀도는 11.9명/㎢에 불과해 작년 GDP 총액은 4203.4억 위안으로 전국 25위지만, 1인당 1만9893위안으로 전국 15위를 차지하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 중국 1위, 철광석과 석탄 매장량 중국 2위 등 막대한 부존자원은 신장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밑거름이다.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 비즈니스 기회와 일자리가 늘어나지만, 그 결실은 거의 다 한족 차지다. 대부분 정부기관과 기업들은 위구르인들이 중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게으르다는 이유로 고용을 꺼리고 있다.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평소 생활에서 종교행위를 구연하는 것도 한족 고용주가 위구르인을 꺼리는 요인이다.

우룸치에서 만난 한 위구르 대학생은 "지난 수년간 신장 전체 실업률은 4%를 넘기지 않았다지만 위구르인만의 실업률은 20%를 넘는다"면서 "신장 최고 명문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기업에 취직하는 못하는 것이 위구르 젊은이들의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교묘한 한족 이주정책으로 신장 내에서도 위구르인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있다. 1949년 75%를 차지했던 위구르인의 비중은 현재 45%로 줄었고, 한족은 5%에서 41%로 늘어났다. 한족 쓰나미에 대한 위구르 젊은이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심각하다.

갈수록 커지는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해야 할 중국정부는 위구르인의 폭력성만 부각시켜 민족 간의 적대감을 조성하고 있다. 우룸치 유혈사태 후 중국정부는 전국 초중고교에서 '민족단결' 과목을 채택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로 했다. 하지만 교과 내용은 '중국은 한가족(中華大家庭)' '민족정책상식' '민족이론상식' 등 소수민족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정부가 지금처럼 소수민족 문제의 근본 원인을 눈 감는다면 제2의 우룸치 유혈사태가 또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경쾌한 위구르 음악 선율에 맞추어 전통춤을 추는 위구르인 공연단.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경제사회적 불균형을 해결하는 것만이 중국 소수민족문제의 해결책이다. ⓒ 모종혁

덧붙이는 글 | 기사 내 모든 지명과 인명은 위구르어 현지 발음대로 적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내 모든 지명과 인명은 위구르어 현지 발음대로 적었습니다.
#신장위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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