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좌절에서 10% 영광을 꽃피워낸 사람,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함

등록 2009.08.19 09:53수정 2009.08.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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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굴곡진 삶이 있을까. 이보다 요철이 심한 인생이 있을까. 아니, 이보다 더 극적인 반전이 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영면했다. 여든 여섯해 대장정을 마치고 마침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일생의 90%는 좌절이었다. 성공은 나머지 1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10%의 성공이 뿜어내는 광채는 90%의 좌절을 능히 카바하고도 남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는 서른 살의 나이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도전, 곧 거대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무모한 도전의 시작이었다.

그는 세 차례 연거푸 낙선했다. 해운업으로 축적한 재산도 탕진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61년 강원도 인제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5.16 쿠데타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정계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그리고 63년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첫번째 오르막이었다. 경쟁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제치고 제1야당의 대권후보로 부상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짧은 오르막에 비해 내리막은 지나치게 가파르고 길었다. 박정희와 맞붙은 71년 대선에서 그는 90만 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결과였다. 너무 뛰어난 것도 죄였을까. 그때부터 그는 가혹한 정치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대선 한 달 뒤 지방 유세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2년 뒤에는 일본 도쿄 납치사건으로 죽을 뻔 하다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박정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잠시 '서울의 봄'을 맛보기도 했으나 그 뒤에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구명운동으로 가까스로 사형집행을 피해 3년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가 8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귀국,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두번째 오르막이었다. 이때도 오르막은 짧고 내리막은 길었다.

87년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비난만 뒤집어 쓴 채 분루를 삼켰다. 5년 뒤 대권 3수에 도전했으나 이번에는 민자당 정권과 야합한 김영삼 후보에 밀렸다. 결국 92년 12월, 정계은퇴 선언 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쓸쓸한 퇴장이었다.


사람들은 이게 김대중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한 그는 97년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마지막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가장 멋지고 위대한 선물을 선사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이다. 세번째 찬란한 오르막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통령병 환자'라고 손가락질 한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거짓말과 약속파기를 밥먹듯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고자 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맘껏 포부를 펼치고 싶은 생각이 더 진했다.

한반도에 다시는 6.25같은 비극적인 전쟁이 없게 하자는 것, 나아가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하자는 것, 하여 남으로는 대양을 얻고 북으로는 대륙을 얻어 한반도의 국운이 세계로 뻗어가게 하자는 것, 그것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필생의 노림수였다. 햇볕정책도 그래서 나왔다.

이런 그에게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가 연속으로 주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우공이산'이란 말 그대로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자신의 구상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세계를 놀라게 한 '트리플 크라운'은 그 수고에 대한 당연한 열매였을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하늘은 더 이상의 과실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햇볕이 본격적으로 내리 쬐기도 전에 미국발 먹구름이 태평양을 건너와 한반도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또다른 좌절이었다.

부질없는 가상이지만, 만약 그의 재임 말년에 미국 선거가 정상적으로 개표돼 공화당의 부시 대신 민주당 고어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한반도의 온기는 지금보다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한반도를 둘러싼 둥북아 정세도 현저하게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이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너무나 먼 길을, 너무나 힘들게 돌아 오느라고 육신이 쇠하고 만 까닭이다. 생각하면, 그는 늘 도전하는 사람, 늘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숱한 좌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숱한 상처 속에서도 움츠려 들지 않았다. 그의 성공과 영광이 더욱 빛나 보이는 까닭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님, 편히 쉬십시오. 당신의 도전, 당신의 싸움, 우리가 이어받겠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DJ의 파란만장한 삶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햇볕정책 의의 #행동하는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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