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들어간 냉면을 먹고 출발해서 그런지 가슴까지 시원했고, 부산이 가까워질수록 남아있던 노여움도 제과점 빙수 녹듯 달콤하게 풀렸는데요. 낙동대교를 지날 때는 한눈에 들어오는 금정산 자락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7년 넘게 살면서 자주 오르던 곳이거든요.
처제 아파트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니까 장모님이 나오며 반가워했고,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이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가져간 우렁이를 냉동실에 보관하고, 하나를 뜯어 초장하고 드렸더니 논에서 잡아먹던 시절을 얘기하며 게걸스럽게 드시더군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처제와 손아래 동서가 들어왔고, 아내가 끓인 된장에 처제가 사온 호박잎을 싸서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녁식사가 끝나니까 다시 이야기꽃이 피었는데요. 저는 몸도 피곤하고 다음날 움직일 것에 대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큰 누님 면회
큰 누님 생일날(11일) 아침에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형님에게 전화했더니 형수하고 둘이 오는데 '대진고속도로'에 진입했다면서 폭우가 쏟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12시쯤에는 큰 누님이 입원해있는 병원에 도착할 것이라고 해서 11시쯤 아내와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노인성 치매로 입원해있는 큰 누님은 퇴행 정도가 심하고 밤이면 기이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항시 보호자가 필요한 분이고,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의 정도가 높고, 기억력 및 판단력이 거의 떨어져 자해 위험률도 높다는 게 담당 의사의 소견입니다.
12시가 다 되어 병원에 도착, 병실로 들어가니까 마침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요. 맛을 음미해가며 먹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수저질을 하면서, 음식물을 바닥에 흘리거나 입가에 묻는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아내가 얼른 다가가 입가를 닦아주고 수저로 밥을 떠 넣어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도 받아먹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묻거나, 고맙다고 하는 게 정상이겠지요.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자탄하면서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니까 멀거니 쳐다보더니 "하이고, 반갑네!"라고 하더군요. 5개월 만에 보는데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가까이 다가앉으며 "누님, 내 이름 알아?"라고 물었더니 무표정이었고, 대답도 없었습니다. 환자인 것을 알면서도 자꾸 물었더니 화난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알어!"라며 고함을 지르는데,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이름은 물론 동생인 것조차 몰랐지만, 처음 겪는 일이 아니어서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치매환자에게는 자꾸 말을 걸어서 기억을 되살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정신과 수간호사였던 아내에게 들었거든요.
누님 생일이어서 축하해주려고 왔고, 조금 있으면 형님이랑 형수도 오는데 이름을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며 잘 기억해보라고 조르니까 그때야 목 쇤 소리로 "종아니!"라고 하더군요. 목적은 달성했지만 반가운 마음은 멀리 도망간 뒤였습니다. 그래도 듣지 못한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그래도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것도 있었는데요. 아내가 형제들 이름을 차례로 알려주는 과정에서 "큰아들은 '김흥배'"라고 하니까, "그럼 '동배'는 누구여?"라며 둘째아들 이름을 대면서 묻기에 알려줬더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형님과 형수가 도착했는데요. 큰 누님은 예상대로 형님 내외를 몰라봤습니다. 형님이 웃으면서 "반가워요. 내가 누구여? 어디에서 많이 본 얼굴이니까 반갑지?"라며 다가앉으니까 모른다고 하면서도 슬그머니 웃더군요. 형님이 "왜 나를 보고 웃어?"라고 하니까, 또 웃으면서 "좋은게!"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피붙이는 다른 모양입니다.
형님이 "흥배(큰아들)랑 어제 왔다 갔어?"라고 물으니까 "응, 왔다 갔어!"라고 하더군요. 제가 물어봤을 때는 생각할 것도 없이 안 왔다고 했거든요. 환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소한 한마디 말 때문에 형제간에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가운 동생들을 만났으니까 재미있는 얘기도 하고 놀아야지 아무 말도 없으니까 심심하다고 하니까 할 얘기가 없다면서 성질을 냈는데요. 이렇게 고함을 치거나 어깃장 놓는 말을 할 때가 더욱 정겹게 다가옵니다. 옛날 누님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자기 생일인 줄도 모르는 누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일이 다가오면 여행을 떠나거나, 집에서 자식들과 형제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자아를 상실한 채 병원에 입원해있다니, 삶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1년 전에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읽을 정도의 인지능력이 있었거든요. 작년 7월 만났을 때는, 어머니 제사 지내러 형님댁에 다녀왔다고 하니까 "누구누구 왔데?"라고 물어볼 정도로 조금은 대화가 통했습니다.
부산 UN 묘지로 나들이 갔을 때는 입구에 음각으로 '정숙'이라고 새겨놓은 표지석을 저보다 먼저 발견하고 "하이고, 누가 저기다 내 이름을 적어놨데?"라고 해서 안타까웠지만, 이름을 읽는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면회를 갈 때마다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거든요.
작년 12월에도 제 이름과 얼굴을 알아봤고, 지난 4월 아내와 함께 다녀올 때는 따라가겠다며 헤어지기를 싫어했는데,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몇 개월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 손목도 만져보고, 통하지 않는 대화도 하려고 합니다. 수척해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거든요. 이래서 형제요, 피붙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형님 내외와 먹은 만두와 '왕갈비탕'
오후 1시 조금 넘어 큰 누님이 잠든 모습을 보고 병원에서 나와서 덕천 지하철역 사거리에 있는 함흥 냉면집에서 만두와 '왕갈비탕'을 먹었습니다. 부산에 살면서 월말부부로 지낼 때 '비빔냉면 먹는 날'을 정해놓고 한 달에 2-3회씩 들르던 식당이지요.
혼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이 좋아서 언제 기회가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형님 내외와 마주하고 앉으니까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왕갈비탕을 한 그릇 포장해달라고 하면 국물을 많이 담아줘 세 번은 먹기 때문에 밥반찬으로는 그만이었거든요.
큰 누님 생일에 형님 내외와 점심을 먹으려니까 희비가 교차했는데요. 함께 있었으면 '맛있다!'는 감탄사를 몇 차례 터뜨렸을 큰 누님이 없으니까 허전했고, 2년 전부터 원했던 자리가 마련되어 한편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만두는 형님과 제가 좋아하고, 단맛. 신맛, 매운맛, 고소한 맛, 개운한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왕갈비탕은 추천하고 싶은 음식인데요. 형수가 "군산에 가면 부산 왕갈비탕 얘기만 하겠다!"고 하면서 맛있게 드시니까 기분이 더욱 좋았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형님 내외는 군산으로 출발했고, 아내와 저는 시원한 강바람을 쐬면서 소화도 시키고 데이트도 즐기려고 걸었는데요. 조금씩 걷다 보니까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넘게 걸었더군요.
도착 이틀째 되는 날 저녁에도 가져간 우렁이를 듬뿍 넣고 끓인 된장에 호박잎을 싸먹었는데요. 양념간장을 얹은 두부와 깻잎의 고소한 맛에 싱싱한 오이무침과 개운한 젓갈이 더해져 식사시간을 더욱 즐겁게 했습니다.
오돌오돌한 우렁이를 씹는 맛까지 가미된 행복한 저녁을 먹고 조금 있으니까 '파마'를 "지붕개량 좀 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을 재미있게 하시는 처 외숙모가 오셨더군요. 그러나 다음날을 생각해서 인사만 드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8.29 11:3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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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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