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틀어다오"

내가 목격한 죽음, 나의 유서

등록 2009.09.04 17:17수정 2009.09.0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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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죽음을 목격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뛰어놀다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개천이의 죽음을 보았다. 경찰과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고, 시신을 덮은 거적이 짧아 개천이의 핏기없고 앙상하게 마른 시커먼 발이 나와 있었다. 그는 40대 후반 정도 나이로 정신이 온전치 못해 아이들에게도 "개천이! 개천이!" 하며 놀림을 받았고, 그가 멀리서 걸어올 때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 선명하게 길에 줄을 그어놓으면 그 줄을 넘어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항상 손에 낫을 들고 다녔기에 무섭기도 했지만, 간혹 나도 개구쟁이 대열에서 악을 쓰며 '개천이!'를 외치다 도망을 치곤 했다.

그는 낫으로 나무 총과 총알을 만들었다. 그의 시신 곁에는 경찰이 찾아온 나무 총과 총알이 수북했다. 사람들은 "그가 아마도 6.25 전쟁통에 정신 이상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죽음은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아흔이 넘는 나이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밭에 나가 일을 하셨고, 그날 밤에는 죽음을 예감하신 듯 며느리에게 몸을 씻겨달라 하시고, 하얀 베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하셨단다. 아들인 아버님이 직접 염을 하셨고, 중학생인 나는 곁에서 묵묵히 죽음을 지켜보았다. 죽은 모습과 산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았고, 시신을 만졌을 때 온기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할머니의 평온하신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했다.

목회를 하면서 일의 특성상 장례를 집례하는 일이 많았다.


가장 힘들었던 장례식은 부검을 마친 시신을 놓고 장례식을 진행하는 경우이거나, 어린 아이의 장례식이었다. 취토를 하는 과정에서 "흙에서 온 몸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품에서 편안히 쉬소서!" 기도를 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로 장례예식이 끝나면 일주일 정도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내게도 예외 없이 다가올 것인데 '아직은 아닙니다!' 생각할 때가 잦다. 그러나 죽음은 여러모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평등하다. 죽음의 세상을 이생의 삶에서 누리는 온갖 풍요와 욕심을 누리는 곳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과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자리는 한편으로 축제의 자리기도 한 것이다. 인지상정으로야 안타깝지만 놓아주고, 남아있는 자들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사는 것이 그 안에 내가 살고, 내 안에 그가 사는 삶이 아닐까?

아이들과 아내는 기겁하지만, 간혹 나는 이런 말을 한다. 그 말을 정리하면 이렇고, 이것이 나의 유서일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내가 남긴 글과 사진들을 보면서 가끔은 내 생각도 해라. 혹시라도 좋은 글과 사진이 있으면 출판도 하고……. 아빠가 능력이 없어서 유산을 남겨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글과 사진이 아빠가 남겨둔 선물이라 생각해라. 그리고 무덤은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러라. 그 나무 안에 내가 들어 있는 것 아니겠니? 그냥 시신을 흙에 묻고 나무를 심으면 거름이 되겠지만, 법으로 어쩐지 모르겠다. 아무튼, 무덤은 안된다. 이러다가 우리나라 무덤 천국 되겠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곳에 와서 식구들끼리 재미있게 놀아라. 슬퍼하지 말고, 그냥 좋았던 추억이 있다면 그 정도 생각하는 것으로 넉넉하다.

나는 늘 미안했다. 더 잘해주지 못하는 내 능력이 나도 미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는 했다. 다른 아빠처럼 해주지 못한 것은 짐이었지만, 나도 저세상에서는 그 짐도 놓아버릴 것이다. 그곳은 평등한 곳이거든. 그곳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빈부의 격차가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거라. 천국이라는 것이 유별난 곳이 아니란다. 너도나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다고 하는 인간들 보면 나는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흙으로 돌아가서 내 몸의 일부가 나무와 들풀에 흡수되어 그들 속에 내가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장례는 아빠가 속내까지 보여주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만 왔으면 좋겠다. 조촐하게 치러라. 영정사진은 그냥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하고, 장례식장에는 아빠가 좋아했던 노래 중에서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틀어놓았으면 좋겠다. 너희에겐 생소한 노래지만 아빠 친구들이 알 거야. 뭐 투사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해방을 갈구하기 마련일 터이고, 나는 해방된 삶으로 들어갔으니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아빠의 노래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아마 아빠 친구들이 아빠가 좋아하던 노래목록을 알 거야.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괜스레 슬픈 장례 찬송가 같은 것 틀어놓지 말고, 그냥 아빠가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틀어주길 바란다. 나도 사랑하는 너희를 두고 가는 길이 아쉽고, 더 함께 있고 싶지만 여기까지가 우리 만남의 시간이니 그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이자.

나를 만나 고생했던 당신에게는 너무 미안하오. 한 일주일만 슬퍼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어른답게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주시오. 그리고 그대는 조금 천천히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오시오. 당신도 수목장을 지내 내 옆에 다른 나무와 함께 묻혔으면 좋겠소. 혹시 아오? 뿌리 다른 두 나무가 하나가 될지.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소. 진심으로 고마웠소."

나의 죽음, 솔직히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저런 일들 정리할 것도 많고 책임져야 할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나의 착각이다. 삶을 살면서 정리할 것 다 정리하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죽음을 맞이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픈 것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오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 혹은 오랜 투병 끝에 맞이하는 죽음이 조금은 덜 슬픈 까닭이다.

가을의 초입,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우울하다. 가을 타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공모글


덧붙이는 글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공모글
#죽음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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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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