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 건널목 지나 ‘만자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시멘트로 덮은 바닥처럼 시골 정서도 메말라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조종안
내가 처음 처가를 찾아가던 1982년 1월 그날은 추위가 대단했다. 찬바람까지 불어 귀가 떨어져 나가는 듯했는데, 날씨 탓도 있었지만, 결혼을 반대하는 예비 장인·장모님에게 허락을 받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에 더 추웠는지 모르겠다.
만경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만자마을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이었고, 비포장 황톳길은 낮에는 눈이 녹아 질퍽거리다 저녁이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시골길을 걷다가 넘어진들 어떠랴. 죽도록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을 따내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의 아내를 통해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한다는 어른들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보자고 한 것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했기 때문이었다. 잘만 보이면 처갓집 동네가 되어 발뒤꿈치가 닳도록 오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외양간의 소와 꿀꿀거리는 돼지들이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쌓여 있는 소 여물과 돼지우리의 분뇨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골을 좋아해서 그런지 오래된 축사와 텃밭이 있는 농가에서 나는 퀴퀴한 흙냄새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날은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토방에 올라 구두를 벗고 방에 들어서니까, 백발의 할머니와 골동품처럼 오래된 목가구들이 백열등 불빛에 반사되는 게 섬에 있는 오래된 외갓집을 떠올리게 했다. 아랫목의 어른들 앞에는 벌써 저녁상이 차려 있었다.
걸어가면서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코치를 받은 대로 먼저 할머니께 절을 했다. 장인이 될 어른께 절을 하려니까 극구 사양했다. 절을 끝까지 받지 않겠다고 해서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좌불안석하고 있는데 음식이 들어왔다. 계란을 풀어 넣은 쇠고깃국과 성찬으로 차린 반찬을 보니까 손님맞이 하는 상이 틀림없었다. 초조함에 맛도 모르고 식사를 하면서도 장모가 될 분의 친절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상을 물리고 할머니를 비롯한 아내 형제들이 둘러앉았다. 절을 못해서 속이 타는 마음은 몰라주고 식구들은 야속하게도 말 한 마디 없이 앉아만 있었다. 대화는 고향과 아버님 함자를 묻는 것으로 짧게 끝났다. 방에는 다시 고요가 흘렀고 급한 성질에 답답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참고 앉아있었다. 침묵이 계속 흐르는데 옆에 앉아 있던 장모 될 분이 말문을 열었다.
"먼 말좀 혀 봐요. 물어볼 거 있으믄 물어도 보고···." "내가 멀!" 장인 될 어른의 입만 주시하고 있는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실망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희망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다.
"그리도, 사업 허니라고 바쁠 틴디 온 손님 아뉴?" "그르케 궁금허믄 자네가 얘기 혀!" 서로 말을 미루는 것을 보니까 할 이야기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허기사, 둘이가 좋다믄 부모라도 헐 말은 없지!" 장모님 되실 분이 방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면서 서운한 표정으로 반승낙하는 말을 했다. 다른 식구들도 이의가 없는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장모 될 양반의 "헐 말은 없지!"는 결혼을 허락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는데, 처음 찾아갔던 그날은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결혼 후에도 어려웠던 장인깡마른 체격에 무뚝뚝한 표정의 첫인상에 가위눌린 나는 결혼 후에도 장인 대하는 것을 꺼렸다. 딸의 신혼생활이 걱정되고 궁금했는지 장인은 가끔 집에 들렀다. 그러나 속마음이 맑음인지 흐림인지를 알 수 없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워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내는 친정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남편이 안타깝게 보였는지 나를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결혼하고 2-3년 지났을까? 하루는 아내가 장인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제안했다. 내일 친정아버지가 오면 점심 대접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재미있는 분이라며 술은 못 해도 꼬리곰탕이나 보신탕은 좋아하니까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라고 했다.
아내 말대로 이튿날 점심을 대접했는데, 결제를 미뤄야 하는 거래처 손님을 맞이하듯 눈치를 봐가며 어렵게 끝냈다. 점심을 끝내고 버스정류장까지 모셔다 드리고 와서는 아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됐어요, 앞으로 그런 식으로 가끔 아버지와 자리를 함께 해봐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진즉 생각을 못하고 있던 터에 아내의 조언은 큰 힘이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처럼 첫 번째 점심을 한 뒤로는 초대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며 나누는 말의 주제는 농사에 관한 일이나 어지러운 시국 이야기였다. 장인·장모가 농사일로 고향을 떠나있어서 몇 년을 뵐 기회가 없었지만, 집에 돌아오시면서 장인과의 점심 자리는 계속되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아버님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열 살 때 환갑이셨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육순인 지금도 모든 일을 부모와 상의하고 술자리를 하는 친구들이 부자보다 더 부럽게 보이니까.
할머니·할아버지뻘인 부모 밑에서 성장해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으로 변해가던 나에게 장인의 등장은 희망이자 기쁨이었다. 그러니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불길한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