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9.23 08:54수정 2010.01.1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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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사회를 산다는 것은 우울하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기껏 돈에 발목이 잡힌단 말이냐. 그래서 나 일찍이 생각했었다. 우울하지 않고 재미있게, 쾌활하게 살기 위해서, 크게 결심을 했다.
돈 벌지 말자. 돈 없어도 사는 세상을 내가 그냥 만들어버리자. 아, 물론 기본 비용은 필요하다. 이를테면 전기료라든가 쌀값 부식비 같은 것들은 벌어야 한다. 그 정도는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난 은혜에 답하는 차원에서라도 감수하기로 하자.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도시를 등지고 시골에 정착했고, 머리를 짜내 만들어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자가용 목욕탕은 내가 생각해도 일품이다. 서양식 욕조가 아니라, 앉아서도 몸을 푹 담글 수 있고, 찬물 더운물 번갈아가며 어 시원하다, 소리가 절로 나올 수 있는 그런 목욕탕을 내 손으로 만들었으니, 그 어떤 자본이 시비를 걸랴.
물은 지하수라서 모터를 돌리는 전기료만 계산하면 된다. 게다가 지하수는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는 훈훈해서 좋다. 그래서 연전에 마을 수도 사업을 할 때 나 홀로 쏙 빠져 버렸다. 그러면 더운물은 어떻게 할 것이냐. 보일러로 물을 덥힌다면 그 비용이 만만찮다. 그래서 또 만든 것이 자가용 보일러다.
과거에 소여물을 끓인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한가득 받아서 장작불로 펄펄 끓인 다음 목욕통으로 옮기는 방식이다. 가마솥은 오래 전에 용도폐기된 것이고, 그밖의 부자재는 주변에 산재한 황토와 돌을 이용했으니, 그놈의 원수 같은 돈은 일원도 안 들었고 오직 내가 씩씩하게 그리고 신나게 운동을 했을 뿐이다. 아,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상황을 주도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처음에는 아예 찜질방도 하나 만들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만둔 이유까지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이 목욕탕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향기를 달리하는 기능을 갖춘 까닭으로 외부 인사들에게 가끔 개방되기도 하는 등 인기가 제법 괜찮다.
어떤 날은 쑥탕이 되고, 또 어떤 날은 구절초탕이 되며, 그밖에도 오데코롱이라든가 애플민트 등등 허브향이 코끝을 살살 간질이는 것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씻어주는 착각이 들게 하는 그런 목욕탕이 되는 것이다.
기억력과 사물 식별에 별 어려움이 없던 삼 년여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아들이 만든 목욕시스템(?)에 감탄을 하곤 했다. "아따 참말로 우찌케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아?"하고, 헤아려보지는 않았지만 삼분마다 한 번씩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그 향기에 취한 채로 목욕탕에서 당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때 참 행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효도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사흘이 멀다고 목욕물을 덥히고는 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다른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해볼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어머니는 감탄은커녕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아예 거부해 버린다. 억지로 어떻게 겨우 목욕을 마친 뒤에는 "아따 시원하다"하고 목소리도 시원하게 한 마디 하는데, 그러면서도 아들이 "오늘 목욕합시다" 하고 말하면 "먼놈의 목욕을, 안 혀, 안 혀,"하고 어디 숨을 데도 없건만 자꾸자꾸 수줍은 소녀처럼 몸을 움츠리며 숨으려고만 드는 것이다.
사람이란 참 이상한 동물이다. 내 자신 사람이면서도 사람이란 이상하다고 말해야만 할 정도로 사람이란 정말이지 이상한 동물이다. 아니 어떻게 거의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고 사물에 대한 식별력 또한 세 살짜리 아이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 마당에도 당신은 여자고 아들은 남자라는 그것 하나만은 그렇게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미치겠다. 미칠 것 같았다. 목욕 한 번 시키려면 옷을 벗기는 데만도 두세 시간씩 걸렸다. 하자, 안 한다. 벗자, 안 벗는다. 어머니는 뿌리치다가 울고, 아들은 짜증을 내다가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한 점 거리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거리낌이 없기는커녕 어머니 이상으로 나는 남자, 어머니는 여자, 이런 의식이 명료하게 있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민망하고, 어떤 날은 슬프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까닭도 없이 억울하기조차 하고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기요양 보험료 납부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목욕도우미 제도 같은 것을 이용해보자 생각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돈이 있어야지만 그것도 가능하단다. 소비를 목적으로 또 다른 것을 소비해야만 하는 돈벌이 그 노예생활을 다시 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안 할란다. 내 어머니 내 손으로 씻겨드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 않으냐.
넉넉잡아 한 두 달 정도면 서로 익숙해질 줄 알았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 옷 벗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고, 아들 또한 어머니의 알몸에 물을 끼얹고 때를 밀어주는 그 일을 두 눈 크게 뜨게 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인가. 이런 일은 세월도 약이 아니라 한다. 어머니는 여전히 당신 손으로는 얼굴 하나 씻지를 못하면서도 옷 벗기를 거부하며 우는 소리를 내고,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의 옷을 벗겨야만 하는 시간만 되면 짜증이 나서 소리를 크게, 정말로 크게 질러대며 눈을 감았다가 절반만 떴다가 천장을 보다가 뒤를 보다가 뭔가를 안 보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게 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어머니는 그렇다고 치자. 왜 나까지 이렇게 '지랄발광'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내가 편안한 심사로 어머니의 옷을 벗길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일은 구태여 사태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상다반사로 정착이 되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 이유,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팔 개월여 동안 내내 그래 왔던 것 같다. 정말이지 지혜도 형편없고 무식도 너무했다. 그런 무식의 바탕에서 해법이라고 쥐어짜낸 것이 며칠 전 자다가 문득 딸이다, 딸, 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친놈. 안다. 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 미친놈이라고.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고 보면 어떻게 해. 내가 어떤 사람을 쥐라고 생각한다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깐 뭐. 그러니까 일단은 그렇게 나가야지. 딸이라고. 내 딸이라고. 세 살배기 철없는 딸 옷을 벗겨 씻기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불편도 없고 불편은커녕 행복할 거야, 그럴 거야 틀림없이. 문제는 내가 짜낸 거짓말에 내가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는데, 아유 몰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할 거야.
이렇게 나는 지금, 중얼중얼 그렇게 자가 최면을 걸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생각대로 그렇게 되어줄까? 아유 모르겠다. 어쨌든 마당 가득 찾아온 가을은 높고, 해바라기는 피었다. 뭐, 생각대로 하면 되고, 하는 노래도 한 구절 생각난다. 그래, 안 될 건 뭐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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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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