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정 선생님이 '영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영어 권력을 차지하려고 배우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 권력을 분배하고 해체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교과로서 영어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가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는 '외국어'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영어는 '인류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고영준
첫 번째 관점을 가진 '갑'씨의 의견을 풀어쓰면 이렇다는 거다.
갑 : 영어는 수없이 많은 외국어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를 몰라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거의 없습니다. 필요한 경우, 필요한 사람만 영어를 배우면 된다는 것이지요. 초등영어교육은 폐지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우리말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지요. 다양한 영어 중에서도, 다양한 원어민 중에서도 미국 발음을, 백인 원어민을 선호하는 것은 사대주의에 다름없습니다.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에 누구나 심정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정작 몸은 따라가지 않는다.
두 번째 관점을 가진 '을'씨의 의견을 풀어보면 이렇다.
을 : 영어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영어를 못하면 세계화 시대 아무것도 못합니다. 내가 못하는 영어, 내 자식에게만은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다른 것 못해도 영어 하나 잘하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전 국민이 영어를 말할 수 있게(영어 못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만 합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좋으니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몸은, 내 자식 교육에서는 이런 주장에 맞게 반응하고 행동하고 있다. 세 번째 관점을 가진 '병'의 의견을 살펴보자.
병 : 영어는 권력입니다. 영어는 외국어이기는 하지만 다른 무수히 많은 외국어와는 다릅니다. 서구 1세계 백인의 언어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세계의 언어라는 점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인의 언어라는 정치적 권력을, 서양의 언어라는 것은 문화적 권력을 과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도 이 '영어'라는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는 영어 권력을 '인정'하고 이를 '분배' 혹은 '해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세 번째 의견은 영어를 '권력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이다. 어렵지만, 뭔가 새롭다. 분배? 해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현 사회는 '자본'을 추종하듯, '영어'를 추종하게끔 만드는 사회이다. '자본'이라는 권력의 본질을 분석하고 이를 넘어서는 삶을 창출하는 이론에 '자본' 대신 '영어'를 넣고 돌려보자. 얼추 감이 온다. '자본'과 '영어'는 이시대의 우상이란 면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영어'의 특수성에 맞는 건강한 관점은 무엇일까?
가르치고 공부해야 할 교과로서 영어는 무엇인가?한 선생님은 영어권력을 분배하고 해체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외국어라는 관점을 명확히 하면서, 더불어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영어 권력을 차지하려고 배우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 권력을 분배하고 해체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교과로서 영어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가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는 '외국어'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영어는 '인류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1) 영어는 외국어다.(관점)한 언어에 대해 '외국어'로 보는 관점과 '제2언어'로 보는 관점은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영어가 외국어라는 것은 영어를 한마디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는 대다수의 국가에서 사는 경우이다. 후자는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처럼 과거 영어 사용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영어가 모국어와 동등한 공용어로 자리 잡은 국가에서 영어를 보는 관점이다. 혹은 영어 이외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영어권 국가에 이민을 오게 되면서 영어를 제2언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이에 속한다. 이들 역시 영어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영어를 하나의 외국어로 본다는 것은 전 국민이, 학생들이 영어를 생활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교육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원어민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는 것, 그것이 영어 교과를 외국어로 봐야 한다는 관점의 출발이다. 따라서 초등학교 수준에서 회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2) 영어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영어는 이미 권력이지만, 또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을 담는 도구이다. 이천여 년 동안 서구 유럽의 문화적 사상적 토양을 흡수한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영어를 가르치며 배운다는 것은 이런 영어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께 배운다는 것이다. 영어라는 의사소통의 도구적 측면 뿐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사상, 문화,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 문화, 사상을 배우는 중요한 매개로서 영문 고전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동양의 고전과 다르게 '진입장벽'이 있다. 한문고전의 경우 한자어가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한자 하나를 읽어 내는 것은 그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내면 읽을 수 있다. 중국어 발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읽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진입 장벽'이 (낮다)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는 다르다. 단어를 읽고, 문장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안내가 필요하다.